이제 지능을 가진 네트워크 세상이 오고 있다. 우유가 떨어지면 냉장고가 자동적으로 우유 배달을 요청하고 동전이 없어도 무선전화로 자판기에서 물건을 살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에 통신기능을 가진 지능형 컴퓨터 칩이 내장되어 물건과 물건이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이트를 연결해 주던 인터넷이 매개체의 역할을 넘어 기업과 개인의 업무를 대신할 수도 있게 된다. 경리장부를 정리하고 인사업무나 개인의 자산관리에 이르는 많은 일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비용도 전기나 수도요금처럼 사용하기 쉽고 쓰는 만큼만 내면 된다.
네트워크가 확장 지능화되고 사용자의 수가 증가할수록 그것을 뒷받침하려면 더 빠르고 강력한 시스템, 즉 슈퍼컴퓨터가 필요하다. 슈퍼컴퓨터는 얼마 전만 해도 연구소나 통계청, 기상청같은 기관에서 주로 쓰였으나 이제는 오히려 일반 기업의 비즈니스용으로 훨씬 더 많이 활용되고 있다.
50년에 등장한 컴퓨터를 보고 사람들은 이런 컴퓨터 12대만 있으면 세계 전산 수요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최고의 컴퓨터 성능은 초당 1만번을 연산하는 정도로 지금의 노래하는 생일카드에 들어있는 칩의 성능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에 불과했다. 59년에 트랜지스터를 장착한 IBM7090은 미 공군의 중추 신경인 대륙간탄도미사일조기경보시스템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연산속도가 초당 20만번 정도였으니 지금 일반 PC의 1000분의 1도 안된다.
76년에 크레이사가 최초로 선보인 벡터형 슈퍼컴퓨터는 지금 PC 수준의 연산속도로도 핵개발, 일기예보 등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후 벡터형보다 훨씬 저렴한 서버들을 병렬로 묶어 연산속도를 높인 병렬형 슈퍼컴퓨터가 등장하면서 그 처리속도가 급속히 증가한다. 97년에 세계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프를 이긴 IBM의 딥블루는 초당 5억의 연산능력을 보여주었다.
병렬형 슈퍼컴퓨터의 연산능력은 계속 발전하여 이제는 조단위의 연산속도를 넘어섰다. DNA 연구를 지원하는 셀레라 데이터센터는 900개의 컴팩서버를 연결하여 초당 1조3000억의 연산능력을 갖고 있다. 핵폭발연구를 하는 로렌스 리버모어 연구소에는 IBM RS/6000 서버 8000개를 병렬로 연결해 초당 12조의 연산속도를 구현했다. 이 서버들은 앞으로 핵폐기물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도 시뮬레이션할 예정인데 이를 위해서는 초당 100조의 연산능력이 필요하며 10년 이상의 연구
기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무어의 법칙 대로라면 컴퓨터의 성능은 앞으로도 계속 1년 반마다 두배씩 빨라질 것이며 병렬형 슈퍼컴퓨터의 성능도 비약적으로 커질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의 생명과 관련한 시뮬레이션에는 지금보다 천 배, 만 배의 슈퍼컴퓨터가 필요하고 또 그 결과도 완벽한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한다. 아무리 뛰어난 슈퍼컴퓨터라 할지라도 인간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컴퓨터가 모든 것을 해결하고 인간을 대신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이를 과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고, 일상에서 활용하고, 또 관리하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주객이 전도된 채 컴퓨터 숲 속에 묻혀 우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기술로부터 얻어지는 혜택을 충분히 누리는 것도 우리의 몫이지만, 슈퍼컴퓨터를 움직이고, 우리의 현재를 이끌어가고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음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김형회 (주)바이텍씨스템 회장(hhkim@bite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