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경제사의 주인공인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강원도 통천군 아산마을에서 빈농의 6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나 노동판을 전전하다 쌀가게 점원이 되고 22세에 신용 하나로 그 가게의 주인이 되면서 시작된 그의 경제인으로서의 인생역정은 해방 이후 한국경제의 영욕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해왔다. 그만큼 그와 그의 「현대」는 한국 현대경제사 그 자체였다.
그는 국가기간산업 발전을 이끈 경제인일 뿐 아니라 북한을 「햇볕」으로 녹인 민간 외교관,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선 정치인,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체육인, 초등하교 졸업 학력에도 10여개의 국내외 명예박사학위를 가진 석학이기도 했다. 고인이 평생 일궈낸 현대그룹은 최근 계열분리등으로 「재계 1위」자리를 내줬지만 내세울 자원 하나 없는 불모의 땅에서 국가경제를 세계 10위권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그 뒤에는 그의 별명인 「불도저」정신이 버티고 있었다.
「인간 정주영」이 국내·외에서 벌인 사업은 한마디로 신화였다. 2년 5개월 만에 완공한 경부고속도로 건설, 9억3000만 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6억3000만 달러짜리 알코바 공공주택 공사, 서해안 지도를 완전히 바꾼 4700만편 규모의 서산 간척사업 등은 「정주영의 카리스마」가 아니면 해낼 수 없었던 대역사였다.
서울 올림픽 추진위원장을 맡아 88올림픽 유치에 일등공신 역할을 했고 팔순을 넘긴 나이에 두차례에 걸쳐 통일소 1001마리를 몰고 휴전선을 넘는 장관을 연출했으며 꿈에서나 그렸던 금강산을 밟도록 해 통일의 기반을 다지고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는데도 한몫했다.
그는 무한한 도전정신, 추진력, 뚝심, 배짱으로 생전에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에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로 완벽한 100%를 채우지, 안될 수도 있다는 회의나 불안은 단 1%도 끼워넣지 않는다』고인이 지난 98년 펴낸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남긴 이 말은 「안될 일」에 대한 도전과 근면으로 요약되는 현대의 정신이자 그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개인적 역량의 우수성만으로 그와 현대의 성장을 설명하기는 불충분하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초 「왕자의 난」을 계기로 촉발된 현대의 분할과정은 이른바 「황제경영」으로 불려온 오너 1인에 의한 경영체제가 그동안 얼마나 곪은 상처를 품고 있었던가를 여실히 드러냈다. 다른 그룹들이 오너 1세대가 물러나면서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아설 무렵에도 현대그룹은 고인이 형식상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그가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까지 수렴청정을 통해 그룹을 좌지우지했다.
따라서 그의 타계는 단순히 위대한 한 경제인, 한국 현대경제사의 주인공이 역사 속으로 묻힌다는 자연적인 의미 외에도 「정주영식 경영방식」이 역사의 뒤안길로 모습을 감춘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적지 않다. 정 명예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중상주의적 경제정책이 필요했던 시절에 적합했던 「전형」일 뿐 지금은 오너 체제에서 전문 경영인 체제로,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경제가 변화, 정착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명승욱기자 swmay@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