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포브스(Forbes)」지를 받아든 독자들의 시선은 한 기사에서 멈췄다. 「미 400대 대기업 플래티넘 400리스트(Platinum 400 list of The Best 400 Big Companies in America)」에서 설립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업체가 당당히 한자리를 꿰어찬 데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포브스지가 매출액 10억달러 이상의 세계 1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총 23개 각 산업 분야의 리더를 선정한 결과,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업체인 애질런트테크놀로지스가 끼었다.
400개 업체들은 매출, 자본수익률 및 순익 신장세 등을 기준으로 선정됐다. 이러한 기본 판단자료 외에도 변화 대처능력, 경영능력 등이 고려됐다. 그러나 애질런트를 그 자리에 있게 한 가장 큰 이유는 기술력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보기술(IT)산업의 핵심인 컴퓨터업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애질런트는 미국내 IT기업들과 기술력 비교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컴퓨터업체인 휴렛패커드(HP) 사업재편성 작업 일환으로 지난 99년 분사한 애질런트는 같은해 11월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되면서 공개기업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상장 당시 21억달러에 달하는 주식량은 실리콘밸리 사상 최대 규모였다. 지난해 6월에는 HP 소유 애질런트 주식을 주주에게 배포함으로써 완전 분사했다. 「agile」이라는 회사명처럼 신속한 분사였다.
애질런트라는 회사명은 재치있고 영리하며 민첩하다는 의미뿐 아니라 잘 준비돼 있음을 뜻한다. 회사 관계자들은 애질런트가 모든 분야에서 잘 준비돼 있고 기술분야에서는 연구소를 중심으로 연구·개발 체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다고 강조한다.
애질런트는 중앙연구소와 분야별 연구소 등 총 5개의 연구소와 각 지역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체계의 핵심은 역시 캘리포니아의 팰러앨토에 소재한 중앙연구소.
중앙연구소를 중심으로 계측기, 반도체, 의료기, 화학분석기 등의 부문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중앙연구소에서는 특히 「미래를 창조한다」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3가지 분야에 주력한다.
첫째, 기존 분야의 개선작업을 한다. 이 작업은 통신, 의료, 생명과학, 전자 및 계측 등 애질런트의 현재 기반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둘째는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가는 작업이고 마지막으로는 기본 기술에 충실히 한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분야는 애질런트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점에서 연구소가 가장 힘을 쏟는 부분이다.
연구소에서는 실제 그동안 컴퓨팅과 통신분야의 변화에 부응해 제품을 개발해왔다. LED나 갈륨비소(GaAs) 반도체, 광파관련 장비 및 LAN기반 장비, 디지털 오실로스코프, 탁상형 질량분석기, 가시/자외선 분광광도계, 모세혈관 전기영동 장치, 심장초음파 영상진찰, 심전도 알고리듬, 전자의학 기록(EMR)시스템 등이 여기에서 태동된다.
최근 들어서는 생물공학(BT), 심장학, 전기엔지니어링, 이미지 처리, 제조 엔지니어링, 재료 공학, 의학 정보 과학, 광전자 공학, 포토닉스(photonics), 의약, 생리학, 반도체 기술, 시스템 통합 등의 범위로 분야를 넓혀 나가고 있다.
애질런트는 지난해 이들 분야에 회사 전체 매출의 12%를 투자했다. 지난 회계연도 매출이 83억달러임을 감안할 때 9억달러에 가까운 돈이 연구·개발에 투자된 셈이다.
올해에는 15%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15억달러를 훌쩍 넘는 돈이 연구·개발에 쓰인다는 말이다. 회사 최고기술책임자(CTO)인 톰 세이포너스 연구소장은 『이러한 연구·개발 노력이 회사의 미래를 담보한다』고 설명한다.
애질런트를 받치는 힘은 또 다른 데도 있다. 바로 구성원들의 기술력 우선 마인드.
애질런트 직원들은 기술력이 연구소에서 나온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연구소가 바로 경쟁력의 상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연구소의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 바로 회사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개념을 갖고 있는 것.
이를 기반으로 연구소는 상품화될 수 있는 제품의 개발에 주력한다. 각 분야에서 확보한 기술을 기반으로 상용화될 수 있는 제품들을 쏟아내놓고 있다.
이와 함께 애질런트는 신제품 발표를 앞당기기 위해서 신속한 인수전략을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총 9개의 새로운 회사를 인수하면서 제품출시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신속한 제품발표가 해답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애질런트는 분사 첫해인 지난해 실적에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HP시절이던 99회계연도 주당 수익률 4.8%에 반해 2000년 회계연도에는 주당 수익률이 6.2%로 올랐다.
올해 역시 정보통신 시장을 기반으로 지난해를 능가하는 실적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애질런트 직원들이 갖고 있는 프라이드는 다른 데 있다.
지난해 말 애질런트는 미 「포천(Fortune)」지 선정의 「사원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은 100개 기업」 가운데 46위에 올랐다. 경영 신뢰성, 업무와 회사에 대한 자부심, 동료애, 기업의 경영철학 및 기업문화, 사원을 위한 각종 자료 등의 평가항목에서 선마크로시스템스(60위), HP(63위), 텍사스인스트루먼츠(85위)를 제친 결과였다.
애질런트테크놀로지스가 기술력의 상징이면서도 기술에만 매몰되지 않은, 기술력이 뛰어나면서도 일하기 좋은 회사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허의원기자 ewh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