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엔터테인]사이버 戰場에 남동풍 분다

수백명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지난 4일 개최된 「어린이 행주산성 역사기행’ 현장. 고양시 학예연구사 정동일 선생님이 유물관을 둘러본 어린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싸움을 잘한 장군은 누구일까요?”

“왕건이요.” “태조 왕건이요.”

선생님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태조 왕건의 인기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쯤 되면 그동안 ‘한국을 상징하는 최고의 장군’ 1위 자리를 고수해 온 이순신 장군이 지하에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릴 만도 하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이 ‘최고의 장군’으로 부상한 것은 최근 KBS를 통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태조 왕건’ 때문.

“뉴스는 안봐도 ‘왕건’은 꼭 본다”는 ‘왕건족’이 생긴 건 이제 옛말이 됐다. 요즘은 “하외다” “하시오”하는 궁예의 말투가 초등학생 사이에서도 유행이다. 후삼국시대의 영웅을 그린 출판물은 수십종에 이르고 있다.

최근 이같은 ‘왕건’ 열풍은 게임 제작으로 이어지고 있다. 게임개발사 트리거소프트(대표 박운규)가 오는 6월 출시를 목표로 준비중인 ‘왕건’은 새로운 소재의 게임 장르를 시도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이 게임은 스타크래프트류의 역사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게임의 배경은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통일신라 말기부터 후삼국시대, 고려 건국이 주 무대다. 게이머는 왕건, 궁예, 견훤 중 한 명을 선택해 게임을 진행하게 되며 삼국을 통일하는 게 최종 임무다.

트리거 박운규 사장은 “KBS와 캐릭터에 관한 협의를 끝냈기 때문에 TV속의 낯익은 캐릭터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며 드라마 인기와 연계한 반사이익을 기대했다.

트리거는 이를 위해 드라마에서 소개된 주요 전장터를 게임 배경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게임상 주요 임무와 이벤트도 드라마와 비슷하게 구성할 방침. 드라마에 출연하는 숱한 장수와 영웅들도 그대로 등장한다.

그러나 게임 왕건이 드라마의 단순한 복사판만은 아니다.

트리거측은 게임에서만 맛볼 수 있는 팬터지 요소를 크게 강화, 드라마와의 차별화를 꾀한다는 전략이다.

특히 커스텀 모드를 통해 드라마와는 아주 색다른 차원의 왕건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게 트리거측의 설명이다. 여기서는 요상한 마법이나 유닛, 희귀한 건물 등 게임 특유의 장치들이 나온다. 또 해군 대신 공군이 등장하는가 하면 하늘을 나는 동물과 배 등 상상의 유닛들도 대거 삽입된다.

게임 왕건의 또 다른 묘미는 게임 결과가 각본이 없는 드라마라는 점이다. 게이머의 실력에 따라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수시로 바뀔 수 있다. 왕건뿐 아니라 ‘태조 궁예’ ‘태조 견훤’도 얼마든지 탄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드라마나 영화가 게임으로 만들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스타트렉(TV시리즈)’ ‘인디애나 존스(영화)’ 등이 게임으로도 성공했다. 국내에서는 ‘짱구는 못말려’, ‘하얀마음 백구’ 등의 애니메이션이 게임으로 제작돼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왕건 열풍이 게임으로 바로 바통 터치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동안 드라마 태조 왕건의 인기 비결을 놓고 전문가들의 숱한 분석이 쏟아졌다.

‘어마어마한 제작비 때문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서’ ‘혼탁한 한국정치 환경에서 영웅을 갈구하는 대리만족 심리가 반영됐기 때문’ 등.

하지만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수준 높은 작품의 완성도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게임 ‘태조 왕건’을 바라보는 업계의 시각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왕건 열풍’이 거세다 해도 작품이 뛰어나지 않고서는 인기에 ‘무임승차’할 수 없다는 것.

또 게임 태조 왕건이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를 심하게 왜곡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미 드라마 태조 왕건은 왕건의 이미지를 너무 미화하고 중국의 고전인 삼국지의 형식을 빌려오는 등 몇가지 문제점이 제기된 바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게임 ‘태조 왕건’은 잊혀졌던 고려사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고 청소년들의 놀이로 재창조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장지영기자 jy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