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류의 미래를 보고 왔다”고 감격한 것은 스탈린시대 소련을 방문했던 앙드레 말로 등 프랑스 지식인들이었다. 2001년 3월 평양을 찾은 남한의 기술진들은 “온나라가 정보화, IT입국을 외치던 80년대 한국의 열기를 다시 보는 듯했다”고 입을 모은다. 고립에서 벗어나 ‘IT강성대국’을 꿈꾸는 북한 현지취재를 통해 통일IT시대로 가는 길을 조망해 본다. 편집자◆
“조만간 컴퓨터 선진국이 될 것입니다. 자신있습니다.” 조선어 워드프로세서 ‘창덕’을 개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평양정보쎈터(PIC) 최경호 종합실장의 말이다.
다소 터무니없는 최 실장의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는 설명했다. “장군님이 컴퓨터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더욱이 컴퓨터에는 수재교육이 필요하다며 영재학교를 설치하고 이들이 19세가 되면 본격적인 프로그램 개발에 나설 수 있도록 지도하셨습니다. 젊은 영재들이 열정을 갖고 달려든다면 곧바로 세계 수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IT에 눈을 떴다. 과거에도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연구소나 기술진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과학자’였다. 산업이나 시장·사회 일반의 관심권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이제는 달라졌다. 북한의 IT열기에 뇌관을 터뜨린 것은 역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그가 컴퓨터로 상징되는 IT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사정이 180도 바뀐 것이다. IT산업을 일으키고 프로그램을 개발하자는 열정이 범국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자본주의 개념인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따른다’는 구호가 신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북한에서 김 위원장의 IT 강조는 그 어떤 인프라나 자본보다 위력적이다. IT가 단번에 사회의 핵심권으로 진입했고 최우선 국정지표가 됐다.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실제로 북한중앙방송은 올해 금성 제1고등중학교, 금성 제2고등중학교, 만경대학생소년궁전, 평양학생소년궁전 등에 ‘콤퓨터수재양성기지’를 신설한 뉴스를 내보냈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이곳에 “최신식의 현대적 컴퓨터 설비를 일식으로 보내줬다”고 한다.
PIC·조선콤퓨터쎈터·김일성종합대학·김책공대 등에서 기자가 만났던 북한 최고의 엘리트들은 IT가 자원과 자본이 부족한 북한경제를 회생시키는 최선의 대안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본이 소요되는 인프라 확충에 앞서 우선 전문인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수재학교 설립은 물론 김일성대와 김책공대는 아예 컴퓨터학부를 확대 개편하고 신입생 정원도 해마다 증원하고 있다. 김책공대 컴퓨터학부에만 1500명이 재학하고 있고 김일성대는 이보다 더 많다. 수년 전에 비해 30% 이상 늘어났다는 설명이다. 최고 인기학과도 단연 컴퓨터학과라고 한다.
북한의 IT인력이나 기술수준은 아직 남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그런 판에 이들이 내놓은 제품은 적어도 범용, 기초 소프트웨어의 경우 세계적 경쟁력
을 갖췄다는 것이 남한 기술진의 평가였다.
코콤이나 바세나르협정으로 최신 연구기자재 도입조차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같은 성과를 나타낸 것은 ‘경이적’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물론 남한이나 세계시장에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상업성 제품, 예컨대 애플리케이션은 별로 없다. 그것은 환경의 제약 탓이고 사회주의 특유의 연구개발체제 탓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2001년 평양은 다르다. 누구나 컴퓨터를 입에 올리고 연구진은 “해외시장 진출을 목표로 제품을 개발하겠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남한의 벤처신화는 자신들에게도 가능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장군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불굴의 의지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이를 세계시장에 내다 팔아 경제를 살리는 것으로 굳게 믿는 북한의 IT전문가들에겐 ‘미래’가 있다.
평양은 IT열기가 뒤덮고 있고 이들의 눈은 어느 새 자본주의 상업시장을 바라보고 있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