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총 457건. 교통사고 발생건수가 아니다. 삼성SDI 수원공장의 슬러리 공정에서 설비 관리업무를 맡은 권영국씨(35)가 회사에 낸 제안건수다. 매일 1건 이상의 아이디어를 낸 셈이다.
SDI에서 부동의 제안왕인 권영국씨는 지난해 삼성 모든 계열사를 통틀어 뽑은 제안왕으로도 뽑혔다.
건수만 많았다고 이같은 영광을 누린 것은 아니다. 삼성SDI가 그의 제안을 채택해 거둔 경제적 효과는 무려 132억원에 이른다. 웬만한 중소기업 매출을 뺨친다.
대표적인 제안이 노광대 교체작업의 개선이다. 혼용생산이 많아지면서 월 7회 정도로 이 작업대를 바꿔야 하는데 좁은 작업공간과 조립도 정교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권영국씨는 냉장고 계란꽂이를 떠올려 이 문제를 해결했다. 계란형의 노광대 조립 기구 개선과 유압식 운반대차를 통해 교체 시간은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이 한건의 개선 효과만 해도 31억원에 이른다.
권영국씨는 이밖에 ‘B-도포기 위치 변경’ ‘세정기 다주파 방식 설치로 마스크 막힘 불량 감소’ 등 높은 등급의 121건을 제안해 슬러리 공정기술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그가 늘 갖고 다니는 회사수첩에는 현장을 다니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로 빼곡하다.
LG전자 세탁기 사업부 클러치계의 박행호 계장(42)도 LG의 내로라할 만한 제안왕이다.
품질관리기법인 6시그마운동의 대가인 그는 6시그마를 현장에 성공적으로 도입해 LG전자의 클러치 품질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250ppm이던 불량률을 52ppm으로 낮췄다. 애초 70ppm이었던 목표를 훨씬 뛰어넘었다.
LG전자 세탁기사업부는 이로써 연간 2억3000여만원의 비용 절감과 25%의 생산성 향상을 거뒀다.
활발한 제안활동 덕분에 박행호씨는 전자CU에서 처음 6시그마 블랙벨트 획득, LG전자 신지식인 선정에 이어 산업자원부가 선정한 신지식인에도 선정됐다.
반도체 재료업체인 피케이엘 품질보증팀의 오현경씨(22)는 요즘 제안의 즐거움에 푹 빠졌다. 낸 아이디어가 채택돼 다른 사람들이 편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이다.
그의 제안은 그다지 획기적이거나 거창하지도 않으나 매우 쓸모있다. 한글로만 된 클린룸 출입승인서를 외국어 양식으로 비치해 외국인 고객들이 직접 쓸 수 있게 한다든지 부서 배치를 한눈에 파악하는 배치도를 사무실 앞에 붙여놓는다든지 하는 그러한 것들이다.
그는 지난해 모두 25건을 제안해 이 회사의 제안 우수상을 받았다.
“별로 제안한 게 없는데요.” 부끄럼이 많아 말꼬리를 흐리는 오현경씨가 말하는 제안 비결은 따로 없다.
자신의 일과 주변에 대한 조그마한 관심을 기울여도 개선할 게 보인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여기에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은 필수다.
권용국씨나 박행호씨 등 다른 회사의 제안왕들도 같은 견해다. 말그대로 ‘아는 만큼 보인다’.
올해로 입사 10년을 맞은 권용국씨의 경우 120개 공정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사고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기업들은 직원들의 활발한 제안활동을 반긴다. 비용 절감과 같은 가시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도 일에 대한 관심을 북돋워 일터를 활기차게 만드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회사들은 최고의 제안왕을 뽑아 푸짐하게 시상한다.
지난해 2년 연속으로 삼성코닝의 제안왕으로 선정된 유철석 대리(41)는 회사로부터 200여만원의 상금을 탔다.
유 대리는 받은 금액 전부를 팀원들과의 단합대회에 써 회사는 물론 동료직원들로부터 인정받는 일석이조를 거뒀다.
그의 대표적인 제안은 브라운관용 유리 성형 후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전자총이 들어가는 ‘넥크 튜브’를 부착하는 공정을 자동화한 것이다. 8대의 기계에 12명이 하루종일 매달려야 하는 작업을 개선함으로써 11억6000만원의 비용을 절감했다.
전문가들은 많은 기업들이 제안제도를 운영해 아이디어를 잘 접수받으나 이를 지식화하는 게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당장 활용할 수는 없어도 언젠가는 빛이 될 아이디어를 사장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시행착오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나온 제안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삼성코닝은 제안에 대해 자체 사이버머니인 ‘코라’를 적립시키는 형태로 지식제안왕 제도를 운영하며 등록된 제안을 검색해 활용하는 직원에게도 코라를 지급하고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