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세계 전지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2차전지 기술에 관한 한 세계 정상이라는 미국과 독일·영국은 특허권을 이용한 로열티를 챙기는 데 만족하고 2차전지 생산에서 사실상 손을 들었다.
바르타로 대표되는 프랑스도 일본 업체와 전략적 제휴라는 미명 아래 일본 업체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일본이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세계 전자 부품 시장에서 이처럼 일본이 독주를 거듭하고 있는 분야는 아마 2차전지가 처음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세계 2차전지에서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던 일본 업체들에게 복병이 나타났다. 복병은 다름아닌 삼성SDI·LG화학 등 한국의 대기업들이다.
국내 대기업들은 타도 일본을 기치로 2차전지사업에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당연히 일본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한국에 기술을 내주고 나서 한국 기업에게 결국 세계 시장을 빼앗겼던 쓰라린 전철을 수없이 간직하고 있는 일본 업체들은 사실상 비상사태나 다름없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마지막 노른자위인 2차전지마저 한국 업체에게 내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일본 전지업체를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상대는 한국 내 내로라하는 재벌 집단이다. 자금력에 관한 한 한국의 재벌기업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일본 업체의 고민은 그만큼 크다고 하겠다.
한국이란 적색 경계가 내려진 일본이 한국 기업을 퇴치하기 위해 마련한 고육지책은 덩치 키우기와 기술보호 장벽 높이기다.
이제 막 전지사업을 시작한 한국 기업을 시장진입 단계에서 누르기 위해 찾아낸 방법 중 하나가 전지 생산 능력을 대폭 증설, 양으로 밀어부치겠다는 전략이다. 물론 여기에는 가격인하 전략도 부수적으로 뒤따른다. 즉 한국 기업이 채산성을 맞추지 못하도록 물량과 가격으로 밀고 가겠다는 것.
세계 최대 2차전지업체인 산요전기를 비롯해 소니·마쓰시타전지·히타치막셀·도시바전지 등 일본 업체들은 사실상 사활을 걸다시피한 증설 경쟁을 벌이고 있다. 증설 규모도 현재 능력이 50% 정도다.
2차전지 최대 업체인 산요전기는 도쿠시마 공장의 생산력을 확대해 월간 1000만개 정도에 달하는 리튬이온전지 생산 규모를 1500만개로 늘릴 방침이다.
마쓰시타전지는 월 900만개의 리튬전지 생산 능력을 1200만개로 증산할 계획이며 니켈수소 전지사업을 산요에 매각, 리튬전지에 주력키로 한 소니는 최근 리튬이온전지 생산 능력을 월 1200만개에서 1500만개 체제로 확대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소니는 리튬이온 폴리머의 생산 능력도 월 120만개에서 수백만 개 체제로 늘린다는 소식이다.
이밖에 히타치막셀은 리튬이온의 경우 각형을 강화해 월생산 규모를 500만개에서 600만개로 늘리고 도시바는 현재 월 800만개인 리튬전지 생산 규모를 1000만개로 확대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여기에다 일본은 최근 들어 가격마저 급격히 떨어뜨리고 있다. 일본 전지전문연구소인 야노경제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99년 개당 661엔에 달하던 리튬이온전지의 가격은 지난해 629엔, 올해는 500엔대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이 같은 수치는 이미 의미가 없다는 게 국내 전지업체들의 분석이다. 국내 전지업체의 한 관계자는 현재 장기계약 물량의 리튬이온전지 가격이 이보다 훨씬 싸다는 것. 국내 휴대폰업체를 의식해서 구체적인 숫자는 밝히기 곤란하지만 현재로서는 만들면 만들수록 손해라는 게 국내 업체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일본 업체들은 중국에 대규모 2차전지 생산 설비를 구축, 한국을 아예 이 시장에서 쫓아내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한국 기업이 일본보다 저렴한 임금으로 도전해 온다면 한국보다 임금이 더욱 저렴한 중국에서 2차전지를 생산, 일반 에프터마켓(일명 그레이마켓) 내지 니치마켓에 공급하겠다는 것.
특히 일본에서는 이미 한물 간 장비,즉 감가상각을 털어낸 장비를 중국으로 이전해 생산하면 한국 전지업체와의 경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계산하고 있다.
일본의 자존심이자 마지막 성역인 2차전지산업을 사수하고자 하는 일본 업체의 노골적인 견제 전략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가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국내 업계에 주어진 과제라 하겠다.
〈이희영 기자 hy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