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전통 산업시대에는 기술만 좋고 품질만 우수하면 됐다. 하지만 어느덧 마케팅과 시장전략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산업시대로 넘어가더니 급기야 정보시대로 들어서자 ‘디자인 경영’이 차세대 경영전략으로 부각되고 있다.
전세계 언론과 경영컨설팅 업체가 한목소리로 강조하는 디자인경영. 이제 중견규모 이상의 기업체 경영자치고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의 경영자들 대부분은 어렴풋이 필요를 느끼지만 디자인을 경영에 밀접하게 적용하는 데는 많은 애로점을 느끼고 있다.
디자인이 과연 얼마만한 가치를 도출할 수 있을지,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좋은 디자인을 선별하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디자인경영을 제대로 펼치려면 디자이너를 고용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필요할 때마다 외부 전문가를 활용하는 것이 좋은지 등등 경영자를 갈등하게 하는 문제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왜 디자인경영인가 =고객의 구매행태가 변하고 있다. 이제 고객은 필요에 따르기보다 기호에 입각해 구매하고 있다. 소득수준이 높아진 탓도 있지만 생필품이 주변에 넘치도록 많아진 공급과잉 시대가 되면서 기업이 아닌 소비자가 시장을 리드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는 성능이 우수한 제품보다는 디자인이 우수한 제품이 더 잘 팔린다. 아니 디자인을 잘 뽑아낼 수 있는 기업의 제품이 성능도 우수하다. 더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성능이나 기술이 대부분 평준화돼 성능으로 경쟁하는 것은 별 효용이 없게 됐다. IBM의 전 회장 토머스 웟슨 2세의 “굿 디자인이 굿 비즈니스다”라는 말이 설득력을 발휘하는 시점이다.
더구나 디자인은 투자비용대비 효과면에서 일반적인 마케팅 활동을 훨씬 뛰어넘는다. 디자인이 좋으면 별다른 프로모션의 도움 없이도 커다란 성공이 가능한 반면 디자인이 나쁘면 세일즈 활동이 뛰어나도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특히 디자인경영이 산업시대보다 정보시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부각되는 것도 정보시대가 바로 다품종소량생산을 주로 하는 이 시대에는 질경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부가가치산업이 성공을 거두는 시대에는 디자인경영을 펼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뜻이다.
◇디자인경영이란 =디자인이란 데지그나레(designare)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이나 계획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려 보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디자인경영이란 이같은 활동이 기업경영 전반에 제대로 반영되고 실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디자인을 최고 가치로 삼아 경영을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 양이 아니라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질 경영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디자인경영이라는 용어는 66년 영국의 국립예술원에서 디자인경영상을 제정하면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고 76년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경영자들이 미국의 보스턴에 DMI(Design Management Institute)를 설립하고 활동을 펼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요 대기업체를 위주로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됐으며 정부가 지난 99년부터 대한민국 디자인경영대상 제도를 제정 시행하면서부터 전 산업에 적극 장려되고 있다.
◇디자인경영 성공사례 =디자인경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이 소니다. 모리타 아키오 전 소니 회장은 소니의 디자인과 브랜드가치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경영의 핵심역량으로 전략화했으며 그를 통해 소니의 브랜드가치를 극대화했다. ‘소니 스타일’로 명명된 소니만의 독특한 디자인은 78년 탄생해 세계적인 히트상품이 된 워크맨에서 분수령을 이룬다.
국내 전자회사들의 경우 LG전자와 삼성전자가 디자인경영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양사는 산업자원부로부터 99년과 2000년에 각각 디자인경영우수기업으로 선정됐다. LG전자는 디지털 LG라는 기업 비전을 실천하기 위한 핵심역량의 하나로 ‘디자인’을 꼽고 있다.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디자인과 개발’라는 개념을 정립, 디자인을 제품개발 단계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개발보다 선행돼야 하는 것으로 보고 디자인연구소를 주축으로 삼고 있다.
삼성전자의 디자인경영은 그룹차원에서 디자인혁명의 해를 선언하며 디자인 우선경영을 천명하고 있는데서 그 단초를 읽을 수 있다. 최고경영자의 의지와 더불어 경영일선에서 일관된 디자인 경영전략을 펼치고 있는 것.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96년 신년사에 앞으로는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기업경영의 최후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디자인경영의 성공조건 =디자인경영은 단지 기업이 디자인을 중시하고 디자이너를 우대하는 것으로는 성공을 거두기 힘들다. 최고경영자의 마인드가 디자인을 중심으로 무장돼야 한다. 디자인은 최고경영자의 책임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그 다음으로는 기업의 목표에 알맞은 디자인경영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반드시 요구된다. 전세계적으로 커다란 명성을 얻고 있는 IBM·소니·애플 등은 모두 자신들의 독특한 디자인경영시스템을 갖추고 기업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정경원 디자인진흥원장은 그가 99년 펴낸 저서 ‘디자인경영’에서 “디자인을 개인의 감각이나 안목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경영의제로 다뤄야 한다. 디자인이 기업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인식하고 디자인전략 수립에 대해 경영이사회에서 다루는 것이 반드시 요구된다”고 조언한다.
★인터뷰: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 정국현 상무
삼성은 97년 아시아기업 최초로 미국 IDEA 금상을 수상했고 비즈니스위크지 선정 디자인우수기업 2위에 뽑히는 등 삼성의 디자인 리더십은 곳곳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실제로 세계적인 브랜드 가치평가기관인 인터브랜드사의 99년 평가자료에 따르면 삼성, 소니, 파나소닉, 필립스 등 4개 글로벌 전자기업의 디자인지수는 89, 95, 92, 88로 나타나 삼성의 디자인수준이 세계적인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성의 디자인이 이처럼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데는 CDO역할을 담당했던 정국현 상무의 역할이 컸다.
“삼성의 디자인 철학은 사용자에서 출발해 내일을 담아내는 디자인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컨버전스 혁명을 선도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함으로써 고객의 관점에서 보다 편리하고, 풍요롭고, 즐거운 생활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죠.”
삼성은 특히 디자인경영센터 내에 디자인선행개발(creating new business) 그룹을 만들어 차세대 디자인에 대한 콘셉트를 만들고 디자인원형을 발굴해 상품화가 실현되도록 이끌고 있다.
“2001년에는 디자인경영환경을 개선하고, 운용체계를 재정비하고, 내년에는 디자인경영체제를 일류화해 내후년에는 디자인경영체제를 정착시킬 것입니다. 이를 위해 현재 마케팅 비용의 10%에도 못 미치고 있는 디자인비용을 현재수준의 5배까지 늘릴 예정입니다.” 세계와 호흡하는 디자인을 통해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삼성의 비전 한 가운데에는 디자인경영이 자리잡고 있다.
<정소영기자 s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