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경영>글로벌 파일(4)일본의 위기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가 사의를 표명했다. 최악의 지지율로 물러서는 모리의 총리직을 누가 이어받을 것인가를 놓고 여러가지 주장이 무성하다. 지난 10년간 형편없었던 몰골의 일본경제와 그 부흥의 책임을 물려받아야 하는 신임총리 후보를 놓고 공방을 치르는 이 순간에도 경제는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있다.

 그러나 누가 모리 총리의 후임자가 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이 점이 바로 추문을 딛고 그가 몇달간 더 버틸 수 있는 이유다. 그가 효과적인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정치·문화 구조에서는 효과적인 정책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체제가 언제까지 갈 것인지. 일본은 현재 거대한 경제적 유동성 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그것은 이익을 희생시켜 가면서 시장점유율을 추구한, 지난 80년 이후 지금까지 시행돼온 도쿄의 경제정책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기업마다 자금회수가 되지 않고 있는 이 문제를 일본은 인위적으로 금리를 낮게 유지함으로써 덮어왔다. 이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이 이렇게 해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외형적으로 성장했고, 결국 일본 금융시스템을 갉아먹은 주범이 됐다. 80년대 일본으로 하여금 승리의 함성을 울리게 해 준 바로 그 정책이 90년대에는 심각한 불황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기간에 일본정부의 최대 관심사는 사회안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은 70년대말 미국의 유동성 위기 때와 비교된다. 8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동안 미국의 대응은 고금리, 높은 실업률, 미국기업의 가차없는 구조조정이었고, 이것이 90년대 미국경제호황의 밑바탕이 됐다. 미국에는80년대의 구조조정을 견디는 사회적 탄력이 있었지만,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일본국민이 고통을 감내하도록 만드는 데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여기에는 두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번째 요인은 사회적 결속이라는 일본의 문화윤리로부터 나온다. 일본은 선진국 가운데 시민혁명을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다. 봉건적 충성심은 상호작용을 한다. 충성에 대한 대가로 지배자는 국민의 이해를 보호해야 한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고금리와 높은 실업률 속에서 지출을 삭감함으로써, 특히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에 대해 유동성 위기에 대응하는 서양식 모범을 따를 수는 없다고 결정했다.

 더욱 큰 영향을 미친 두번째 요인은 일본 정치 엘리트들의 성향이다. 일본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긴 하지만, 민주주의 제도 뒤에는 기업과 밀착한 두꺼운 관료 엘리트층이 여러 부서에 포진해 또 다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안정적인 위치와 기득권을 가지며 실질적으로 거대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고급 관리들은 경제 문제를 개인 및 제도의 이해 관계라는 시각에서 바라본다. 일본 사회를 뿌리부터 바꿔놓을 수 있는 추진력은 이들로부터 나올 수가 없다.

일본은 금융 및 산업 기반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더욱 깊

고 깊은 구멍 속으로 빠져들었다. 1991년에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던 수단들은 10년이 지난 뒤에는 불행하게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일본 경제를 재편하는 데 요구되는 질적, 양적 고통은 한 세대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일본이 현재 처해 있는 경제 위기는 급속히 사회 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실업률은 이미 일본의 사회 계약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일본 경제의 미래는 그만큼 불투명하다. 모리 총리가 비틀거리고 있지만 아직 인물난은 해결되지 않았다. 한가지 뚜렷한 조건은 모리 총리만큼 자리를 굳세게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보리스 옐친 밑에서 줄줄이 이어지던 러시아 총리들을 떠올리게 해 준다. 별로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러시아는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다 옐친을 물러나게 하고 러시아를 완전히 새로운 길로 이끌어간 총리가 나타났다. 정말 심각해진 후에야 게임은 해결 국면을 맞는다.

 일본과 러시아는 ‘지진 사회’다. 지표면은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가운데 사회적, 경제적 힘을 속에 쌓아 가다가 갑자기 껍질을 벗고 모든 걸 뒤집어 놓는다. 천천히, 꾸준하게, 단계적으로 변화해 가는 미국과는 달리 러시아와 일본은 전혀 바뀔 것 같지 않은 반석과도 같다. 질문은 간단하다.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총리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이 시스템은 얼마나 더 오래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