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산업 재조명](2)디지털 혁명「인류 역사」가 바뀐다

백범 김구 선생은 청년시절인 1896년 일본군인을 살해한 죄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 수감됐다. 독립투사였던 백범이 응징한 일본군인은 바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장본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고종황제는 그 사실을 사형선고 이후에야 알게 됐고 사형집행만을 기다리던 백범을 살려 주려 했다. 이 때 사용된 연락수단이 3일전 개통된 한성∼제물포간 행정전화였다. 이를 통해 고종의 의지가 긴급히 전달됐고 백범은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전화가 백범을 살린 셈이다.

 에드먼드 힐러리경과 셰르파 텐징 노게이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다는 소식이 영국 여왕의 귀에 들어가는 데는 사흘이 걸렸다. 지난 53년의 일이다. 에베레스트 남쪽 정상에서 조난당한 산악인 로브 홀은 그곳에서 뉴질랜드에 있는 아내에게 위성전화로 마지막 작별 인사를 전한 뒤 숨을 거뒀다. 96년이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두가지 에피소드에는 IT의 의미와 속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백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면 그후 대한민국 독립투쟁사는 다시 쓰여져야 했고 백범이라는 민족의 스승도 단지 평범한 ‘살인범’으로 생을 마감했을 뿐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를 바꾼 데는 통신이라는 IT기술이 숨어있었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힐러리경과 조난 산악인 로브 홀의 대비는 정보의 유통속도가 극명하게 드러난 예라 할 수 있다. 아날로그의 대명사 전보가 전파하는 정보의 속도와 디지털 위성통신의 속도는 한 개인의 삶뿐 아니라 변화된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의 차이를 상징하고 있다.

 ’왜 IT인가’라는 우문(愚問)에 대한 현답(賢答)은 IT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특히 유난히 시대 조류에 어둡고 변화에 소극적인 보수계층을 갖고 있던 과거의 한국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쫒아가지 못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근대화로 불리는 산업사회의 문을 열지 않고 자력갱생을 외쳤지만 결국은 외세에 의해 개방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1000년이 넘도록 정신적 물질적 가르침을 주었던 이웃나라 일본에 점령 당한 채 식민지로 전락하기도 했다.

 당시 세상이 바뀌는 줄 모르고 변화를 거부하다 나락으로 떨어진 나라가 어디 한둘이랴. 총칼을 앞세운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에 ‘제국’의 자리를 내주었다. 유럽을 뒤덮은 산업혁명의 물결을 외면하며 여전히 걍력한 봉건제 전제군주정치를 펼치던 러시아의 차르체제는 공산주의 혁명 앞에 한순간 무너졌다. 중화사상으로 무장된 천자(天子)의 나라 중국은 이리떼처럼 달려드는 서구 열강에 국토가 이리저리 뜯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봉건사회, 농경사회의 강자들은 철기로 무장한 열강의 진출에 석기를 들고 대항하다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역사의 패러다임이 변하면 이에 맞춘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된다. 합리성과 기계화를 바탕으로 급진전된 산업사회는 이에 적응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를 확연히 차별화했다. 소위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전세계 규모의 동시적 질서를 창출해낸 것이다. 이는 구조적으로 고착됐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리학 법칙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쟁에서건 한번 앞서가면 가속도가 붙어 앞뒤의 차이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요즈음 시장용어로 풀이하면 선점효과가 될 것이다.

 한국은 분명 산업사회의 후진국이다. 비록 전쟁의 폐허에서 근대화·산업화를 외치면서 달려왔지만 아직도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서구 국가들이 200년동안 성취한 산업화를 50년만에 ‘압축성장’으로 따라가 봤지만 여전히 세계경제의 주도국이 아닌 변방세력에 불과하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다. 어느새 산업사회는 밀려나고 디지털 정보사회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

 산업사회의 속성이 물질의 대량생산이었다면 디지털사회는 정보의 대량생산과

유통이다. 산업사회의 동력이 기술과 숙력된 노동력이었다면 디지털사회는 창의성과 도전정신이 엔진이다. 산업사회가 무역을 통해 전세계 규모의 경제권을 형성시켰다면 디지털사회는 시간과 공간·국경을 초월한 진정한 의미의 단일세계 경제권을 탄생시켰다.

 게다가 디지털사회는 그 속에 지구촌 모든 개인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산업사회가 자동차와 비행기의 속력으로 움직였다면 디지털사회는 빛의 속도로 가동된다. 그 디지털사회를 가능케 하는 총아는 IT다. 사회 경제체제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현장에 IT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한국은 영원히 선진국 혹은 세계를 주도할 1등국가로 자리매김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노동력을 갖추었다 해도 축적된 산업자본도 없고 차별화된 기술도 없다. 앞선 나라의 하청 생산국으로 그저 안정된 세계 경제의 주변국에 만족해야 한다. 부가가치와는 담을 쌓고 지내야 한다.

 IT패러다임은 한국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세계를 주도할 ‘강대국’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패러다임의 속성이 한국인의 정서와 조건에 가장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IT패러다임은 기존 산업사회의 모든 기득권을 부정한다. 중국과 스페인이 그러했듯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제 아무리 발달된 산업국가라도 졸지에 후진국으로 내려앉게 된다. 이미 세계 최고 기업의 자리는 GM이 아닌 마이크로소프트가 차지하고 있다.

 기득권이 없다는 것은 기존 개념으로는 도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또 누구에게나 열려진 신천지를 의미한다. 산업사회 초강국 일본이 주저앉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산업사회의 틀과 기득권을 디지털사회로까지 연계시키려는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강의 제조업과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지만 이를 IT패러다임에 곧바로 얹는 것은 위험부담이 따른다. IT패러다임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모조리 버리고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창의력이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받는다. 한글을 비롯, 전통 문화유산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빨리빨리 문화’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속도에 민감하다. IT패러다임을 역설하는 많은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상자 밖으로 나와서 생각하라’는 명제에 가장 잘 들어맞는 나라요 국민이다. PC방을 두고 일본은 물론 전세계가 혀를 내두르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부존자원과 자본이 부족했던 산업사회의 한국은 제3세계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사이버 영토가 등장하고 지적재산권이 자본이 되고 있다. 무조건 튀는 아이디어와 사람이 경쟁력이 됐으며 ‘철학’을 가미한 제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다.

 맨 땅에서 수출입국을 부르짖으며 이만큼 성장한 한국이지만 우리 앞에는 더 넓은 세상이 열려 있다. 이제 마음껏 개척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21세기 국운을 IT에 걸어야 하고 이를 위해 IT산업을 재조명해야 할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