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스템통합(SI)업체들이 해외 시장으로 뻗어가고 있다. 주요 공략 대상도 처음에는 베트남과 필리핀 등 동남아 지역에서 출발해 이제는 베네수엘라,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일본 등 전세계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동안 국내 SI업체들은 수천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면서도 이중 대부분을 국내 수요로만 충당해 왔다. 국내 시장에서 과열 경쟁은 곧바로 SI산업의 전체 수익성 악화로 이어지고 전체 IT산업 분야 중 가장 낙후된, 저부가가치 영역이라는 멍애까지 안게 됐다. 반도체, 가전 등 국내 주요 전자산업들 대부분이 수출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키워온 반면 SI산업은 20년 넘게 내수에만 의존하는 형태로 발전해 온 것이다.
‘앞으로 2∼3년 안에 SI시장 판도는 더이상 국내업체 끼리의 경쟁구도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유수 IT업체들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핵심역량을 확보하고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는 회사만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은 국내 SI업체 대부분이 공감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SI산업도 더 이상 우물안의 개구리로 머물러 있지 않을 작정이다. 더욱이 주요 SI업체들은 국내 시장에서 맛보지 못한 ‘수익성’을 해외에서 만큼은 반드시 일궈낸다는 각오다.
실제로 IT분야의 종합적인 정보인프라를 제공하는 SI산업의 위상과 중요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또 국내 SI기술이 선진국과 비교해 기술수준과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인 해외시장 환경과 기술 인력 수준을 고려하면 SI 분야는 고부가 수출산업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SI업계 관계자들 대부분이 “국내 SI분야 기술과 인력 수준은 이미 세계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따라서 SI산업이 수출주도형 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말한다. 특히 “컨설팅에서부터 전산시스템 기획과 설계, 소프트웨어 개발, 하드웨어 설치 등 IT 각 분야의 연관기술이 응집된 SI분야의 해외 진출은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SI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이를 반증하듯 국내업체가 최근 수주하는 해외 SI프로젝트는 규모면에서도 연일 기록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1300만달러의 베트남 중앙은행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5000만달러 규모의 필리핀 등기부 프로젝트, 그리고 베네수엘라 전자주민증사업으로 단일사업 수주규모가 수억달러대를 이미 돌파했다. 최근 급부상한 중동지역 IT프로젝트는 수십억달러 이상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SI연구조합측이 내놓은 자료에서도 국내 SI 수출은 지난 99년에 5260만달러를 기록한 데 이어 오는 2005년에는 연평균 59.7%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9억달러 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해외시장에서 실제 SI 수주에 나서고 있는 영업 관계자들의 의견도 상당히 낙관적이다.
“베트남·중국·필리핀 등 국내업체들이 주요 타깃으로 보고 있는 국가들 대부분이 정보시스템에 대한 인식 수준과 인프라 측면에서는 매우 낙후된 것이 사실이지만 프로젝트 수준면에서만 본다면 전체적인 업무 프로세스가 국내 환경과 유사해 일본·미국 등 해외업체에 비해 국내 업계가 유리한 점이 많다”는 게 SI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말하자면, 미국 및 일본 등 선진국은 시스템 유지 및 보수 비용를 과다하게 요구해 처음으로 전산화를 시도하는 국가들로서는 국내 SI업체들의 영업방식이 더욱 매력적일 수 있어 어떤 측면에서는 선진 기업들보다 국내업체가 더 높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 2∼3년간 주요 SI업체들이 국내에서 성공적으로 수행한 각종 정보화 프로젝트는 해외 SI시장 개척의 중요한 발판이 되고 있다.
지난해 완료한 우체국 금융분산시스템 구축 노하우가 베트남 금융결제원 프로젝트 및 파키스탄은행 종합정보시스템 구축사업 수주의 초석이 된 데 이어 지난 95년부터 추진해 온 등기업무 전산화사업과 최근 마무리된 신공항 정보시스템도 해외 대형 SI프로젝트 수주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할 전망이다.
특히 국내에서 성공한 이들 주요 정보시스템 구축 현장에는 일본, 미국 등 선진국은 물론 국가적인 정보화사업이 한창 진행중인 중국, 동남아지역 개발도상국의 정부 관계자 및 실무자들이 잇따라 방문하는 등 국내 SI기술을 전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하고 있다.
SI업계의 이러한 해외 진출 움직임에 따라 정부는 물론이고 SI 관련 기관 및 단체들도 SI분야 수출을 지원하기 위한 총력전에 돌입했다. 정부가 대규모 SI사업을 발주하는 개도국에 IT홍보사절단 및 민·관 합동시장개척단을 파견하고 국내 SI기업의 수주작업을 적극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지역에 SI시장 개척단을 보낸데 이어 하반기 중에는 2억2000만달러 규모의 베네수엘라 전자주민증 등 각종 SI사업에 대한 수주 지원을 위한 중남미 시장개척단도 곧 파견한다. 또한 정부 주도로 금융전산망 등 공공정보화 사업이 활성화되고 있는 베트남, 파키스탄 등 개도국도 주요 수출 지원대상 국가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SI 수출이 활성화되기까지는 아직도 극복해야 할 여러 난제들이 많다.
국내 SI업체들이 자체적인 패키지 솔루션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적된다. 자체 솔루션이나 기술 없이는 근본적으로 해외에서 가격, 기술면에서 경쟁력을 갖기 어렵고 높은 수익성을 기대하기도 힘들다는 것이 SI업계의 판단이다.
삼성SDS 김홍기 사장도 “국내에서처럼 시스템 용역 개발사업을 수주하는 형태로는 해외시장에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힘들며 특화된 자체 솔루션을 가지고 이를 세계 시장에 판매한다는 마인드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해외 시장에서 국내업체들간 공조체제를 구축해 과당 경쟁을 막는 것도 SI수출 활성화를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로 꼽힌다.
“과거 국내 H사가 수주한 베트남 프로젝트에서 해외업체들은 한국업체와의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수주전 막판에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등 공동전선을 편 것과는 달리 국내업체들의 과당경쟁은 해외에서도 여전했다”는 게 당시 실무자들의 전언이다. 심지어 한 엔지니어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오히려 국내 업체보다 해외업체가 우군으로 느껴질 정도였다”며 당시에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기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이러한 국내 업체들끼리의 흠집내기로 인해 입찰이 지연되고 심지어 무산될 위기까지 갔다는 점에서 앞으로 해외시장에서 만큼은 국내업체의 과당 경쟁이 반드시 지양돼야 한다는 원칙론에는 모든 업체가 공감하고 있다. 과당 경쟁으로 인한 폐해가 심각해지면서 해외 시장에서 국내 업체들이 서로 기술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분위기를 서둘러 조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국내 업체간 공조체제를 구축하느냐의 문제에서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 그동안의 영업관행으로 볼 때 대형 SI업체간 공동보조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와 SW관련단체들이 그룹사들을 오가며 진땀을 흘리고 있기는 하지만 쉽게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다.
결국 대형 SI업체들 스스로가 수주 결과와 규모에만 집착한 마구잡이식 해외사업 추진과 국내업체끼리의 제살깎기 경쟁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해외사업 추진에 대한 정확한 내부기준을 자체적으로 수립해야 한다는 게 실무 담당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또한 SI 전문가들은 “국내 SI업체의 해외진출에 따른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1단계로 국내기업들이 동반진출해 공동 거점을 확보하고 2단계에서는 현지시장 조사, 현지업체와의 제휴를 추진할 수 있는 소규모 지사를 설립한 후 3단계에서 현지인 고용과 합작법인 설립 등으로 사업을 발전시켜나가는 단계적 해외진출, 현지화 작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SW 수출은 기술력과 언어, 마케팅 능력 등이 종합적으로 요구되는 사업이므로 국제규격의 품질인증 획득은 물론이고 언어 능력을 겸비한 전문 전산인력 확충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SI업계 관계자는 “금융, 제조, 공공 등 각 분야의 효율적이고 선진화된 업무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우수한 SW 제품을 개발, 우리 브랜드로 세계화하고 이를 기초로 해외 대형 정보화사업을 수주하는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전제하며 “SI 수출은 지금이 적기”라고 강조했다.
<주상돈기자 sdj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