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콘텐츠의 세계>(29)게임산업과 비즈니스 모델-80년대의 수익모델과 교훈

 1970년대가 업소용 아케이드 게임의 시대였다면 80년대는 ‘가정에서 컴퓨터 게임을’이라는 비전을 구체화한 시기였다. 가정용 비디오 게임산업은 80년대 중반이후 오늘날까지 일본이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그 콘셉트와 기술적인 바탕은 역시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오디세이의 마그나복스(1972년), 채널F의 페어차일드(1976년), RCA스튜디오의 RCA(1976) 등 8비트급 게임기들이 이미 70년대에 미국에서 출현했다. 그러나 이 제품들은 글자 그대로 TV 연결형 게임기에 불과했다. 오늘날 말하는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의 효시는 1977년에 나온 아타리 VCS(Video Computer System)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인형 회사 마텔이 개발한 인텔리비전(1979년), 구두 가죽회사에서 게임회사로 변신한 콜레코사가 상품화한 콜레코비전(1982년) 등도 닌텐도의 패미컴에 앞서 등장해 수백만대에서 많게는 수천만대가 넘게 보급되었다. 그러나 1983년 ‘아타리 쇼크(Atari Shock)’를 계기로 미국의 가정용 비디오 게임 업계는 순식간에 몰락하고 만다. 그 원인은 크게 3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 번째, 당시의 게임기 업체들이 오픈 아키텍처 방식, 즉 하드웨어 판매로 수익을 올리는 모델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게임기(플랫폼) 자체가 소프트웨어(전용 타이틀)를 파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었다. 당시는 게임 회사들은 플랫폼 제공회사의 라이선스를 받지 않고 게임을 만들 수 있었다. 그 결과 아류작, 복제품의 홍수로 이어졌고 가정용 게임기에 대한 소비자들의 염증을 자초했다.

 물론 아타리VCS가 널리 보급된 후 아타리의 일부 개발자들이 독립해서 만든 최초의 서드파트(3rd party)인 ‘액티비전’을 비롯해 타이틀 전문 개발회사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아타리가 이들 서드파티와의 의무이행 소송에서 잇따라 패소함으로써 서드파티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두 번째, 함량미달의 전용타이틀이 범람하는 가운데 플랫폼 회사들은 생존을 위해 가격인하 경쟁을 시작했다. 심지어 일련의 에뮬레이터 기능을 제공함으로써 독자적인 플랫폼으로서의 존재기반을 서로가 붕괴시켰다. 마텔의 경우 1982년에 출시한 인텔리비전Ⅱ에서 아타리 게임을 이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 체인저’라는 것을 확장기능으로 제공했다.

 또 한가지는 70년대 후반 매킨토시, 코모도와 같은 퍼스널 컴퓨터가 등장해 게임기능을 제공함으로써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82년 하반기부터 미국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슬럼프에 빠졌고 게임기 사업 비중이 전체 매출의 50%에 육박했던 워너커뮤니케이션그룹의 주가가 폭락, 미국 월가에 ‘아타리 쇼크’가 오게 된 것이다.

 1983년 닌텐도의 패미컴을 필두로 시작된 일본의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산업은 미국의 실패를 교훈삼아 플랫폼이 아닌 전용 타이틀에서 수익을 남기는 일명 ‘클로즈 아키텍처’ 방식으로 전개된다. 즉 플랫폼 회사가 엄선된 전용 타이틀 회사에 라이선스를 부여하고 타이틀 생산, 공급량을 통제한 것이다. 물론 이 방식도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닌텐도의 경우 초창기 타이틀 생산, 유통권을 배타적으로 확보하고 서드파티 회사가 게임이 담긴 롬 카트리지 하나를 찍을 때마다 3000엔 안팎의 로열티를 받았다. 또한 연간 타이틀 제작물량까지 통제했다. 1994년 마쓰시타와 3DO가 주도해 만든 3DO시스템,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SCE)의 플레이스테이션(PS) 등에서도 이같은 정책은 유지됐다.

 특히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는 게임 저장매체를 롬 카트리지 대신 콤팩트디스크(CD)를 채용한 장점을 십분 활용해 라이선스 로열티를 낮추고 시장의 반응에 따라 타이틀 공급량을 조절함으로써 유통 구조의 혁신까지 가져왔다.

 닌텐도, 세가, 소니 등 일본 업체가 구축한 클로즈 아키텍처 방식의 수익 모델은 조건상의 차이가 있을 뿐 마이크로소프트의 X박스에도 그대로 적용될 전망이다.

<유형오 게임브릿지 대표 gb1@gamebridg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