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게임시장이 처음 형성된 것은 70년대 후반이다. 당시 ‘갤러그’로 대표되는 오락실용 아케이드 게임기들이 등장하면서 게임산업은 시작됐다. 80년대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를 거쳐 90년대 초 PC게임이 등장하면서 게임산업은 본격적인 형성기를 맞는다.
특히 PC게임 태동과 함께 컴퓨터 그래픽, 네트워크, 가상현실, 3D 모션 등과 같은 컴퓨터 소프트웨어 기술이 게임에 접목되면서 게임산업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게임산업이 컴퓨터 소프트웨어 기술에서 시작됐듯 게임학계도 소프트웨어 공학의 기술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교수들로부터 출발했다.
특히 전산학과나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한 교수들 중에서 게임이 일반적인 소프트웨어와는 다르다는 점을 먼저 인식한 몇몇 교수들이 게임학계의 텃밭을 일궈냈다.
90년대 초반 게임학계의 태동기부터 활동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김동현 세종대 영상대학원장(44)이다. 그는 연세대학교(83년)와 오사카대학 환경공학과(박사·91년)를 거쳐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시스템공학연구소 등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김 원장은 컴퓨터 그래픽을 게임에 접목시키는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실적과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 원장은 PC게임이 부상한 95년부터 게임산업을 국가차원에서 육성할 수 있는 전문기관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해 관심을 모았다. 김 원장은 “지금이야 게임이 디지털 콘텐츠의 핵심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내가 게임에 눈을 떠 나름대로 학계 활동을 시작한 90년 중반만 해도 교수 체면에 게임을 어떻게 하느냐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교수들도 지원센터가 필요하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마당인데 정부부처는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90년 후반 인터넷 붐과 함께 문화 콘텐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김 원장의 비전은 문화관광부의 게임지원센터 설립으로 가시화된다. 김 원장은 현재 국내 게임산업의 메카로 자리한 게임종합지원센터 설립에 산파역을 담당했으며 초대 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년3개월 동안 소장직을 맡으면서 김 원장은 게임 아카데미 개소, 투자조합 조성 등을 통해 게임산업 육성을 위한 인프라를 성공적으로 조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 2월말 김 원장은 세종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영상대학원장으로서 게임 석사과정을 진두 지휘하고 있다.
김 원장과 함께 원로 대접을 받고 있는 사람은 이만재 아주대 미디어학부 교수와 주정규 서울 게임대학 원장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90년대 중반부터 게임학계 활동을 해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이만재 교수(53)는 연구원, 벤처기업 창업, 교수 등 다양한 변신이 이채롭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스탠퍼드대 전기공학 석사, 텍사스 오스틴대학 컴퓨터공학 박사 등 다채로운 이력을 소유한 이 교수는 일찍부터 게임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71년 해군장교로 복무할 때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통해 게임을 처음 접했으며 78년 올림퍼스 전자에서 추진했던 게임기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80년 이후 미국 유학시절에는 아타리컴퓨터를 통해 컴퓨터 게임과 친숙해졌으나 국내에는 게임산업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86년 귀국한 뒤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컴퓨터연구부장으로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게임과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 교수는 91년 솔빛미디어를 설립해 디지털 콘텐츠 분야의 일을 시작했다. 솔빛미디어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벤처기업으로 90년 초반 국내 멀티미디어 기술을 선도했다.
95년 숙명여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정보방송학과, 전산학과에서 멀티미디어 분야의 인력개발을 위해 노력했으며 98년 아주대학교에서 미디어학부를 설립, 현재까지 게임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이 교수가 설립한 미디어학부는 4년제 대학의 게임학과로는 명문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 교수는 지난해 게임종합지원센터 게임인력양성 프로그램 과정 개발에 참여한 바 있으며 최근 전자통신연구원에서 추진하는 게임엔진 개발 업무에 참여하고 있다.
서울 강남에서 사설 게임스쿨인 서울게임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주정규 원장(45)은 우리나라에서 사상 처음으로 게임학과를 설립하고 게임학회를 발족시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숭실대 전자 공학과와 단국대 전자공학 석사를 거쳐 숭의여전 교수로 재직중이던 98년 1월 주 원장은 국내에서 최초로 ‘컴퓨터게임학과’를 설립했다. 주 원장은 99년 3월 청강산업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이 학교에서도 컴퓨터게임학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주 원장은 99년 9월 한국컴퓨터게임학회, 2001년 첨단게임학회 등 2개 게임 관련 학회를 만들어내는 산파역을 담당했다. 현재 첨단게임학회 부회장으로서 왕성한 학회 활동을 벌이고 있다.
김동현 원장, 이만재 교수, 주정규 원장 등 원로 3인방보다는 조금 늦게 학계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선배 못지않은 성과를 이뤄낸 2세대 인사들도 많다. 김휴종 추계예술대 문화산업대학원장(35)이 대표적인 경우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경제학 박사 등의 이력을 갖고 있는 김 원장은 게임 마케팅과 관련된 분야에서 걸출한 인물로 평가된다. 96년부터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김 원장은 게임을 비롯한 디지털 콘텐츠 산업에 대한 경제학적인 접근을 시도해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게임산업의 경제학적 특성’을 비롯해 30여권에 이르는 그의 저술은 엔터테인먼트 마케팅의 기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경희대 권준모 교수는 게임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접근을 시도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컬럼비아대학 심리학·철학 석사, 컬럼비아대학 심리학 박사 등 게임학계의 다른 인물에 비해 다소 이채로운 이력을 갖고 있는 권 교수는 95년 귀국해 12월부터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전신인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새영상부의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게임의 사회문화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권 교수는 ‘게임의 심리학’ ‘폭력적인 게임이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 ‘온라인 게임을 하는 청소년들의 심리상태’ 등을 집필중이다.
이밖에 교육계에는 고욱 아주대 미디어학부 교수, 김경식 호서대 게임공학과 교수 등을 포함해 60여명의 교수들이 활동중이다. 특히 한국과학기술원 원광연 교수는 가상현실 분야에서 독보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한국과학기술원 신성용 교수는 컴퓨터그래픽 분야의 대가로 꼽히고 있다.
김경식 호서대 교수(41)는 서울대 컴퓨터공학 박사를 마치고 전자통신연구원 선임 연구원, 호서대 컴퓨터공학부 교수 등을 거쳐 99년 3월부터 호서대 게임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후진 양성뿐 아니라 각종 연구활동도 활발히 펼쳐 그동안 △온라인 게임인력 상황 및 개발인력 양성방안 조사(한국전자통신연구원) △3D 온라인 게임엔진 요소기술 연구(한국과학재단) 등 17건의 연구과제를 수행했으며 아주대 이만재·고욱 교수 등과 같이 펴낸 ‘디지털 컨텐츠 개론’(안그래픽스·99년)은 이 분야 후학들의 필독서로 읽혀지고 있다.
아주대 미디어학부 고욱 교수(41)는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컴퓨터전자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삼성전자를 거쳐 95년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를 시작하면서 학계에 입문했다. 97년 미국 뉴욕필름 아카데미 감독 과정을 수료했다. 고욱 교수는 3D 애니메이션, 모바일 컴퓨터 게임 등의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세종대 장창익 교수와 변승환 박사는 학계와 업계에서 동시에 일가를 이룬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장창익 세종대 교수는 홍익대 미술대, 미국 뉴욕대 미술대학원, 뉴욕 공과대학 미디어앤아트대학원 등지에서 미술 디자인과 컴퓨터그래픽을 전공한 경력을 살려 ‘아트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경희대, 홍익대, 한성대, 한양대 등을 거쳐 현재는 세종대 사이버대학 게임PD 학과장을 맡고 있으며 매직아이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로도 재직중이다. 90년 충남대에서 전산학 박사학위를 받은 변승환 박사(34)는 90년 충남대 교수, 94년 서남대 교수 등을 거쳐 99년 멀티미디어컨텐트라는 아케이드 게임업체를 설립했다.
게임학계 관계자들은 현재까지 학계에 몸을 담고 있는 교수인력은 100여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향후 게임이 디지털 콘텐츠의 핵심으로 자리잡으면서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게임학계의 대내외 위상은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주변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학계 내부에서 게임을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교수간 교류 미흡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게임은 문화상품으로 정보통신 관련 기술, 영상 및 콘텐츠 관련 기술 및 노하우, 비즈니스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야 함에도 각 분야를 융합하려는 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게임 시나리오 분야와 마케팅 분야의 학계 활동 미진은 게임산업 발전과 학계 자리매김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게임학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창희기자 changh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