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7)원세개와 가짜 전보(중)

러시아에 조선의 보호 육성을 요청한다는 제2차 한·러 밀약설의 내용을 민영익으로부터 전해들은 후, 청국 군대가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는 가짜전보를 만들어 조선을 위협한 원세개.

 1911년 발생한 중국 신해혁명 과정에서 혁명파와 청국 조정 사이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 황제를 퇴위시키고 초대 총통에 오른 원세개는 당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도 가짜전보를 활용했다.

 원세개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서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의 퇴위를 도모하게 되는데, 국무대신 연명으로 퇴위를 요청하면서 민의를 따르지 않으면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왕조의 자손들과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상소를 올리게 하고, 이어 러시아 주재 청국 공사 육징상으로부터 외국주재 공사의 연명으로 된 전보를 발송케 했다. 국제정세로 보아 이미 신뢰를 잃은 청국 황제는 퇴위함이 마땅하다는 내용으로, 그 전보는 원세개가 은밀하게 만들어 육징상에게 보내게 한 전보였다.

 이 전보 내용으로 청국 조정은 낙심하게 되고, 드디어 1912년 2월 11일 청국 황제의 퇴위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어 원세개는 대 총통에 취임하게 되지만 욕심 많은 원세개는 총통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가 국내외의 반발이 심해지자 황제직을 반납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평생동안 자신의 출세를 위해 통신매체를 적절하게 활용한 원세개가 보낸, 500의 군사만 있으면 조선의 국왕을 폐하겠다는 비밀 전보를 받은 북양대신 이홍장은 진정하여 소요하지 말고 조용히 움직일 때를 기다리라는 내용을 역시 비밀 전보로 원세개에게 보냈다.

 다음은 비밀 전보의 일부 내용이다.

 “조선 정부측에서 문서·국새(國璽) 등이 위조임을 극력 변명하였다. 러시아 주재 청국 공사의 회답에도 러시아 외무부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하고, 앞으로 그런 문서가 오더라도 위조 문서로 휴지화 시킬 것이라는 언질까지 주었다고 한다. 또한 서울에 파견된 한성전보총국 총판 진윤이의 전보에도 인심이 매우 당황하여 변란이 발생할까 두려우며, 대원군의 세력은 완전히 고립되어 큰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주일 청국 공사의 전보에도 일본 정계에서 ‘증거가 없는 뜬소문을 믿고 사태를 격화시킬 필요가 없다’고 충고한다고 한다.”

 이홍장은 또한 이러한 사실을 1886년 7월 27일 청국 조정에 보고했다. 여기서, 왜 이홍장은 이처럼 설득조의 조심스럽고 정중한 명령을 내린 것일까. 그것은 조선과 무관한 또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때 이미 이홍장은 북양함대 주력을 조선 연해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시달했었다. 그러나 일본 나가사키 항구에서 머물고 있던 정여창의 북양함대는 일본 관민 사이에 벌어진 충돌 사건에 연루되어 행동을 취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홍장은 굳이 북양함대의 출동지연 사유를 조정에 보고하지 않아도 될 방안을 모색, 원세개에게 각종 정황을 첨부한 거사 중지 명령을 시달하게 되었다. 결국 조선 국왕의 폐위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저지된 것이다.

 이로써 제2차 한·러 밀약설로 야기된 가짜전보 사건과 국왕 폐립을 기도하기 위한 원세개의 청국군 출동 파문은 일단 수습되었다. 그러나 수습되지 않은 여러가지 문제가 남아있었다. 정부 대관의 무능이 거듭 폭로되었고 왕실의 위신이 더욱 땅에 떨어졌다. 조준두, 김학우 등이 러시아 베베르 공사의 항의로 며칠 안되어 모두 석방되고, 조선에 들어 와 있던 각국 영사들간의 사이도 기묘하게 변했다.

 또한 원세개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홍장은 조선 국왕 폐립을 거사 직전에 중지시켰지만 한·러 밀약설에 대해서는 원세개의 보고를 전폭적으로 신뢰, 조선을 계속 감시하고 간섭할 것을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 대한 원세개의 간섭과 압력은 더욱 가중되었다.

 원세개의 요청으로 은퇴하여 칩거중이던 김윤식이 재차 외무독판으로 집무하게 되면서 1886년 8월 6일, 김윤식 이름으로 각국 공사들에게 조회문이 발송되었다.

 “본국의 불순분자들이 뜬소문을 날조하고 공문서를 허위 작성하여 국새까지 모사함으로써 외국인을 기만하고 있기 때문에 이후부터 외국인이 조선 사람들과 조약을 맺을 때에는 공·사를 막론하고 통리아문(統理衙門)의 개인(蓋印)이 없으면 사사로운 약속으로 간주하겠다.”

 국왕의 국새가 찍혔더라도 통리아문의 관인이 없으면 무효. 대외적으로 정부의 신뢰를 스스로 포기한 꼴이 되었다. 이어 원세개는 조선정부의 외무협판 서상우 등을 천진·북경으로 파견하여 북양아문과 예부 및 총리아문을 차례로 방문하고 이번 사건을 해명하게 했다.

 여기서, 국왕과 민씨 일가의 몰락을 초래할 수도 있는 한·러 밀약설을 민영익은 왜 원세개에게 폭로했을까. 가짜전보를 만들어서까지 대처를 해야할 만큼 중대하고 시급한 사항을 왜 민영익은 당시 조정에서 배척, 반대세력으로 변해있던 청국의 원세개에게 제공해야 했을까.

 민영익. 그는 처음 왕비나 다른 척신들과 의견을 달리 하여 ‘인아거청책(引俄拒淸策)’에 반대하고 왕비 및 조준두, 김가진, 김학우 등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원세개에게 그 내용을 폭로했다. 그러나 사태가 진전됨에 따라 원세개가 대원군과 결탁하여 대원군의 다른 아들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까지 세우게 되자 민영익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인아정책을 저지하려다가 오히려 자기와 민씨 일가가 패가망신 당하게 된다는 것을 느낀 민영익은 국왕 및 중신들에게 원세개와 청국 정부의 음모를 알려주어 대책을 강구하게 하였다. 민영익은 이러한 일로 국왕과 조정에 대해서는 다시 체면을 찾았지만, 원세개나 청국 정부에 대해서는 경계의 인물로 지목되고 말았다.

 1886년 8월 17일. 원세개가 이홍장에게 보낸 전보에서는 조선 왕실의 동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민비는 크게 놀라고 또 원성을 많이 들어 보름 전부터 병이 매우 심중하다. 내종(內腫)을 앓아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다 하여, 신하들은 의기 소침해졌다. 서상우가 천진에 도착하면 엄중히 타이르고 문책한 다음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서 계고(戒告)하기 바란다. 국왕도 이제는 민영익이 중도에 도피한 것을 매도하는 정도다.”

 민영익은 조선의 국왕을 비롯한 민씨 일가에게도 비난을 받아야 했고, 원세개에게도 비난을 받게 되어 결국 홍콩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민비 자신이 병을 얻을 만큼 타격이 컸다면 원세개는 그만큼 의기가 양양해졌을 것이다. 원세개는 감국대신(監國大臣)과 같은 위세로 왕실을 대하였고, 정부 대신들은 자신의 부하처럼 부렸다.

 당시 미국인 고문관 데니는 원세개의 횡포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청국공사 원세개의 흉악무도한 행위는 이에 이르러 극도에 다다랐다. 만약 이 대역모(大逆謀)를 성취하게 된다면 소란·방화·유혈·암살 등의 참상이 연출됨은 물론이요, 서울에 거류하는 외국인과 일반 시민의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하였을 것이다.”

 그처럼 각종 횡포를 부리던 원세개는 1886년 9월 초순, 조선의 국왕을 알현하여 여러가지 의견을 진술하고 이른바 ‘유언 4조(喩言四條)’와 ‘시사 급무 10관(時事急務十款)’이라는 것을 문서로 올렸다.

 편지 형식으로 되어있는 문서의 머리말에는 먼저 갑신정변을 전례로 들고, 당시에 국왕이 김옥균 등 이른바 자주, 자립책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봉변을 당하다가 마지막에 겨우 청국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된 것을 상기시키면서, 지금도 역시 부국강병론을 펴는 소인배를 임용하면 반드시 변란이 일어날 것이니 만일 이 말이 잘못된 것이라면 자신의 눈을 빼고 혀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눈을 빼고 혀를 끊겠다.’

 한 나라의 국왕에게 이처럼 방자한 글을 써 올릴 수 있는 것인가. 비록 원세개가 무인이었다고는 하나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변란이 발생하지 않으면 눈을 빼고 혀를 끊겠다고 한 원세개. 청일전쟁 발생 직전 아프지도 않은 몸 때문에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청국으로 전보 한 장 달랑 띄워놓고 도망친 원세개의 이후 내용은 다음 호에 거론한다.

 

김영근: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