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세 아마 7단, 이번엔 1타 2득을 노리나요?” “아, 이게 웬일입니까. 어이없는 동반자살이에요. 네∼에∼!”
자못 심각한 표정의 연예인 대국 기사 두 명이 바둑판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지기도 하지만 대국에 임하는 자세만큼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신중하게 각도를 재고 손끝으로 상대방의 바둑알을 튕기는 순간, 흑백의 바둑알이 동시에 바둑판 밖으로 떨어진다.
이른바 알까기계에서 가장 무서운 수로 소문난 ‘동반자살’이다.
“알까기를 보기 위해 1주일 내내 월요일을 기다린다.” “방송에서 대국을 보는 것도 유쾌하지만 실제로 경기를 해보는 것은 더 재밌다.”
TV 알까기 대국을 손꼽아 기다리는 학생부터 직접 바둑판이나 PC를 통해 알까기를 즐기는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알까기 열풍이 끝간 데 없이 몰아치고 있다.
진지한 태도의 연예인 대국 기사, 프로 바둑기사 윤기현 9단의 말투를 절묘하게 흉내낸 개그맨 최양락의 해설, 흑백의 바둑알 14개로 웃음을 자아내는 알까기는 이제 단순한 TV프로그램의 의미를 넘어섰다.
알까기는 MBC 코미디 프로그램인 ‘코미디닷컴’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최근 월요일밤 신설된 ‘오늘밤 좋은밤’으로 자리를 옮겼다.
11시에 가까운 늦은 시각 방영되지만 인기 시트콤 ‘세친구’가 종영된 빈 자리를 유감없이 메우고 있는 것은 물론 코미디닷컴이 폐지될 당시 홈페이지에는 알까기 코너를 예고없이 옮긴 것에 대한 항의 메일이 폭주하기도 했을 정도로 인기가 치솟고 있다.
이같은 인기를 입증하듯이 20여개에 이르는 알까기 모바일·웹게임이 쏟아져나온 지도 이미 오래다. 최근에는 바둑뿐만이 아닌 장기 알까기 게임도 선풍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웹게임 개발업체인 시노조익은 조이랜드(http://www.joy-land.com)를 통해 장기 알까기 게임을 선보여 한달 만에 30만명이 넘는 회원을 끌어들였고 5월에 개최한 장기 알까기 온라인 대회도 성황을 이뤘다.
특히 온라인게임의 경우 상대방을 공격할 바둑알을 선택한 상태에서 마우스를 뒤로 잡아당겼다가 놓는 방식이어서 실제 손가락으로 알을 튕기는 것과 비슷한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성인 인터넷 방송국의 누드 알까기 대회도 한동안 화제를 불러모았다. 누드 알까기는 이름처럼 대국을 펼치는 인터넷자키(IJ)들이 자신의 알이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옷을 한 겹씩 벗는 것.
지상파와 케이블TV도 이에 뒤질세라 알까기를 흉내낸 패러디에 나섰다. 케이블 채널인 코미디TV는 ‘패러데이나잇’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메추리알·달걀 등의 ‘진짜알’까기 대회를 열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MBC의 ‘일요일 일요일밤에’의 한 코너에서는 퀴즈를 맞힐 사람을 뽑기 위해 알 대신 연필까기를 선보여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이처럼 각종 매체와 게임을 통해 알까기가 유명세를 타면서 최근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알까기가 생활속의 놀이문화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직장인이 회사에서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에 점심내기 알까기 대국을 한 판 벌이는 장면은 흔한 풍경이 됐다. 두 명이 경기를 진행할 때 옆에서 한 명이 최양락의 말투를 흉내내 해설을 곁들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대학생 사이에서 알까기를 패러디한 촌극은 MT 및 모임 등에서 가장 인기있는 볼거리가 됐으며 최양락의 성대모사는 제일 먼저 터득해야 할 개인기다.
심지어 프로기사들 사이에서도 남는 시간을 활용해 알까기를 하거나 기원에서 대담하게 알까기를 즐기는 엽기적인(?)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TV프로그램에서 게임으로, 이제는 직장인들의 놀거리로. 얼핏 유치한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일찌감치 사장될 수도 있었을 알까기가 이렇듯 유행을 선도하는 문화코드로까지 자리매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알까기 신드롬의 배후에는 ‘심각한 척하는 복잡 다단한 현실에 대한 조롱’이 숨어있다고 입을 모은다. 바둑판의 점잖고 철학적이기까지 한 질서와 규칙을 정면으로 부수는 것 자체가 통쾌할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다.
복잡하고 형식을 갖춘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n세대에게는 알까기가 그것 자체로 즐거운 뒤집기라면 어른들에게는 어릴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촉매제로 작용한다는 풀이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영화 ‘친구’의 흥행으로 대변되는 복고 열기가 알까기라는 구닥다리 게임을 다시 추억 속으로부터 끄집어내는 데도 한몫 했다는 것이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과 주창윤 교수는 “정적이면서 한껏 폼잡는 바둑의 틀을 깸으로써 품위에 도전하고 있다”며 “지금까지 흔히 보아왔던 정치풍자가 아니라 일상적인 행위에 대한 패러디라는 점도 일반인에게 친근감을 더해준 요소가 아닐까 싶다”고 분석했다.
어지러운 정치판과 불안한 경제현실을 창출해낸 허울뿐인 권위주의를 비웃고자 하는 욕망이 오늘의 알까기 신드롬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