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빼고 혀를 끊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해대며 조선 국왕 앞에서 공갈 협박을 일삼은 원세개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가설된 전신선을 장악, 가짜 전보를 만들고 청국 정부와 신속하게 정보를 교환하고 가공하여 횡포를 부릴 수 있었다.
원세개는 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이후 중국의 신해혁명과 대총통 취임, 황제 등극 과정에서도 정보통신의 가치를 깨닫고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형성을 위해 500만달러 이상의 전보비를 지불하면서 황제에 오른 원세개는 그에게 보내진 단 한장의 전보에 충격을 받고 황제 즉위식도 거행하지 못한 채 쓰러져 생을 마감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한 인물이기도 했다.
“조선은 부서진 배와 같다. 나무는 이미 썩고 벽이나 지붕도 떨어져 나갔다. 새 것으로 바꾸어 견고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힘이 없어 중수(重修)도 못한다. 원세개가 배를 고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여러 번 고쳐 주었다. 전하와 여러 신민은 모두가 배 안에 있는 사람이다. 배 안에서 어디로 표류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원세개가 온 지 10개월도 못되어 묄렌도르프 사건에 이어 김옥균 사건이 있었고, 또 7월 사건(제2차 한·러 밀약설)이 발생하여 다시 뱃전을 쳤다. 이제 또 침몰하려는 것까지 치면 세번째다. 원세개도 배를 고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1886년 가짜전보 사건 당시 원세개가 조선의 국왕에게 보낸 ‘유언4조(喩言四條)’ 내용의 일부다. 제국주의의 침탈을 합리화하는 논리와 조선정부와 국왕에 대한 거만함과 무례함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무시할 수 만은 없는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어 원세개는 조선 내정 개선에 관한 내용인 ‘시사급무 10관(時事急務十款)’을 국왕에게 보내 민씨 척족을 중심으로 한 정부 고관들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들이 ‘원 아무개가 우리 내정에 간섭하려고 한다’고 중상하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나, 그들이야말로 오로지 자기 한 몸의 보신책에 급급하고 있다. 그리하여 국가의 대계를 그르치고 남을 중상 모략하여 자신의 간교한 음모를 감추려고 한다. 원세개의 생각으로는 일본에 가서 김옥균을 찾아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조선 안에서 새로운 김옥균을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한다. 지금 척족들은 김옥균이나 다름없다….”
며칠 후, 원세개는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조선의 소식을 전보를 통해 보고했다. 국왕 측근자가 제공한 대궐 안의 소식이라고 하며, 자신이 조선의 국왕에게 내정 개선을 제안한 후 조선의 근황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내용들이었다.
“국왕은 매우 후회하고 있다. 왕비도 역시 같은 심정이다. 전에는 사람의 말을 잘못 믿고 여러 번 일을 실패했다. 앞으로는 모든 것을 청국에만 의존하고 소인배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즉, 중국의 이홍장과 원세개가 아니었다면 내 한 몸과 왕실의 모든 생명을 보전할 수 없었을 것이니, 내가 이제 그 은혜를 잊고 있는 것은 큰 불의와 같은 일이므로 이후부터는 서로 편안하게 하겠다고 말하였다.”
원세개는 이어 ‘요즘은 조선 정부의 국왕 측근이 원세개와 결탁하고 의지하므로 소인배가 우환을 일으킬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내용과 ‘민비는 아직도 병세가 심중한데 원세개가 요즘 여러 신하들과 거듭 수작하여 퍽 안정되었다고 한다’는 전보를 자기의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이홍장에게 보내 자신의 업적을 알렸다.
서울과 부산간의 자체적인 전신망 가설 등 자주적인 통신망 구축을 서둘렀던 조선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자신이 관리하는 청국과 연결된 전신선을 이용하여 조선 정부에 대해 온갖 횡포를 다하던 원세개는 1894년 동학 농민봉기가 시작된 후 당황하기 시작했다.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한 청국군이 동시에 출병한 일본군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원세개는 어물어물하다가 조선을 일본 쪽에 놓아주었다는 망신을 당하기 십상일 것이라는 생각에 병을 핑계로 1894년 6월 12일 청국정부로 한장의 전보를 발송했다.
“본인은 본래 소갈증(燒渴症)이 있는 데다가 요즘 오랜 설사 때문에 기(氣)가 허해져서 간밤에는 머리가 몹시 혼미하고 온몸이 아팠다. 곧 양의사를 불러 진찰해 보니 열이 100 도가 넘는다고 했다. 그래서 머리에 얼음을 놓았더니 신열이 좀 내렸다. 아직 몸이 크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조선의 사정이 지금 복잡 다단하기 짝이 없는데 본인은 이렇게 누워 있기만 하고 일이 없으니 크게 걱정이다. 본인 대신에 당소의(唐紹儀)에게 이곳 일을 맡기기 바란다.”
같은 해 6월 17일 원세개는 청국 정부로부터 귀국 허가를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원세개는 앞으로 조선 정부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되건 말건 상관없이 그날 밤으로 조선 정부와,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에게 온다 간다 말 한마디 없이 도망치듯 서울을 빠져나갔다. 허술한 가마에 호위 한사람 없이 허겁지겁 밤길로 인천에 도착, 18일 새벽 서둘러 귀국해 버렸다.
원세개가 도망치고 나자 조선의 정세는 급변했다. 청국의 위세는 땅으로 곤두박질 쳤고, 일본의 위세가 그날로 판을 치기 시작했다. 일본은 통신시설을 장악했고, 당장 일본군이 묵을 군인숙소와 완전한 청국군 철수, 조선과 청국 사이에 맺어진 통상조약의 폐기를 요청해 왔다. 다음날도 아니었다. 원세개가 도망친 바로 그날 오후였다.
일본의 이러한 터무니없는 요구에 당시 외무독판인 조병직이 원세개의 뒷일을 맡은 당소의를 찾았다. 당소의는 대답이 궁하여 청국의 이홍장에게 전보를 보내 답변을 듣고자 하였으나 이미 전신은 불통이었다. 통신의 장악과 두절.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청일전쟁의 승부는 여기서 이미 결정이 나 있었다.
도망치듯 조선을 떠난 원세개는 이후 북양대신이 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이 된 후 황제에 오르지만, 그를 반대하는 세력이 전국 각지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키자 곤경에 빠졌다. 원세개는 많은 이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일본을 이용하여 난을 진압하고 황제 자리를 지키려고 하였지만, 일본과의 비밀협정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게 되어 더욱 곤경에 빠졌다.
이때 원세개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5명의 장군이 연명으로 보낸 비밀전보를 받았다. ‘조속히 황제제도를 취소하라’는 내용의 전보였다. 그 전보로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원세개는 이튿날 회의를 열고 자신의 황제 수락 안을 취소했다. 연호를 홍헌으로 고친 지 83일 만에 즉위식도 치르지 못한 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총통의 자리까지 버리지 못한 원세개에 대한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손문을 정점으로 하는 중화혁명군의 세력에 밀려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1919년 5월 22일. 원세개의 마지막 보루였던 사천성에서 치명적인 전보 한장이 날아들었다. 원세개가 가장 신뢰하는 심복 사천장군 진환으로부터의 전보였다.
‘사천성은 원세개 개인과의 관계를 단절한다.’
전보를 받아든 원세개는 졸도하고 말았다. 잠시 후 깨어난 원세개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했고, 마침내 병석에 드러눕게 되었다. 강철같은 사나이, 15명의 첩을 거느리면서 날마다 정력을 자랑하던 원세개도 결국 실의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었다. 그해 6월 5일 밤. 권력의 화신과 같았던 원세개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그토록 애착을 가지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 활용했던 전신을 통해 보내온 전보 한장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조선의 돈과 땀으로 가설한 우리나라의 최초의 전신선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가짜전보를 만들어 조선을 위협하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 활용하던 원세개. 당시 그 전신선의 주인인 조선은 아무런 대책없이 당하고만 있었다. 힘, 나라의 힘
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힘을 바탕으로 전신선을 장악하고 그를 통해 온갖 횡포를 부린 원세개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정보통신 매체의 형태와 기술은 변했을 지라도 그 기능성은 변하지 않고 더욱 확대된 현재의 상황과, 역사의 특성인 힘의 논리는 정보통신 매체에 가장먼저 적용되고 그 영향력 또한 매우 크고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인식하게 된다.
김영근: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