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산업 재조명](7)글로벌 경쟁력이 IT강국 `잣대`

거대 기업간 인수 합병이 한창이다.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자동차, 정보통신은 물론 은행을 비롯한 금융, 통신서비스, 심지어 유통업에 이르기까지 서로 몸집을 합쳐 세를 물리는 작업이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지구촌 차원에서 동시다발로 진행되고 있는 거대 기업화의 원인은 간단하다. 산업사회에서 공간적 제한을 받던 시장의 크기가 21세기 디지털사회에서는 전세계 규모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자동차 한대를 팔아도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마케팅에 나서야할 만큼 세상은 변했다. 인터넷과 정보기술의 발달은 지구촌을 그야말로 단일 시장으로 변모시켰다. 동네 슈퍼가 다국적 할인점에 밀려 사라지고 있는 현실은 아주 국지적 현상이지만 이것이 전세계 규모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경제 상황이다.

 특정 지역, 특정 계층만을 대상으로 한 제품은 여전히 차별화라는 무기로 시장에서 통할지 몰라도 범용성을 갖춘 제품은 그럴 처지가 못된다. 60억 세계인이 비슷한 성능의 비슷한 가격, 비슷한 브랜드의 상품을 찾는다. 뉴요커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나 이용하는 이동전화는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똑같은 상품가치를 갖

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지간한 자본력과 기술력, 브랜드 인지도를 가지고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게 됐다. 단일 시장에서의 지배력은 뻔하다. 몇몆 소수의 거대기업만이 이 시장에서 생존하고 이익을 낼 수 있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적어도 오는 2010년께에는 전세계에 5개 정도의 회사만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게 상식이다. 자동차 산업 태동기에 미국에서만 400개 기업을 넘어설 정도로 자동차 회사가 난무했다. 물론 그들도 일정기간 동안에는 모두 먹고 살았다. 그러던 것이 40년대를 거치면서 현재의 GM, 포드, 크라이슬러라는 3강 체제가 정립됐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21세기 초입에 그같은 현상이 재연될 것이라고 예고한다. 미국의 1∼2개, 일본의 1∼2개, 독일 1∼2개, 여타지역 1개 정도의 업체만이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런 예상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 자동차회사간의 구조조정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은행과 통신서비스 역시 마찬가지다. 빅뱅이라 불리는 거대기업간 합병을 통해 초거대기업이 잇따라 탄생하고 있다. 이제는 한 나라의 시장에서 점유율 1위라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거대기업일수록 세계적 규모의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불리기에 더욱 적극적이다.

 IT시장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특히 한국 IT산업의 3개 핵심 품목인 반도체, 이동전화 단말기, PC가 모조리 이같은 현실에 노출되어 있다. 이제는 전세계를 커버할 수 있는 자금력과 유통망, 브랜드 인지도를 확보하지 못하고서는 퇴출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한해에 4억대 이상이 거래되는 이동전화 단말기 시장을 보자. 세계적 범용성을 획득한 이후 이 시장은 노키아, 모토로라, 에릭슨이라는 3강이 지배했고 여타 일본과 유럽업체들이 명맥을 유지해 왔다. 세계 시장의 10% 가량으로 추산되는 CDMA분야에서만 한국의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명함을 내민 수준이었다.

 경쟁이 격화되면서 급기야는 시장 점유율 2, 3위를 오가던 거대기업 에릭슨이 단말기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한국업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면서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우량기업 에릭슨도 수익 악화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세계 랭킹 2위 업체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술이라고 해봐야 노키아, 모토로라, 에릭슨이 무슨 차이가 있겠나. 문제라면 역시 이윤을 낼 수 있느냐다. 수익은 남보다 성능이 뛰어난 제품을 좀 더 값싸게 팔아야 생겨난다. 에릭슨은 이것이 노키아에 밀렸다고 봐야 한다.

 60억 인구를 대상으로 한 범용 제품은 이제 ‘메르세데스 아반테’를 만드는 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브랜드 인지도와 품질 신뢰성에 아반테의 가격을 겸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 요인 가운데 하나가 부품 구매력이다. 이동전화 단말기는 조립지향적 산업이다. 제조업체는 누가 부품을 좀 더 싸게 구입하느냐에 경쟁력을 두고 있다. 또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이 1년도 안돼는 패션화 상품이어서 부품의 적기 조달 역시 중요한 관건이다.

 한해에 1억대를 파는 회사와 1000만대를 생산하는 기업의 부품 발주량이 같을 수 없다. 당연히 부품을 많이 발주할수록 단가는 내려간다. 이와 함께 1억대 회사는 부품업체에 안정적인 수요를 보장해 준다. 1억대 규모의 기업과 1000만대 수준의 회사는 부품 즉 생산원가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는 동시에 적기 공급에도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덩치를 가진 기업일수록 경쟁력이 확보되고 이는 곧바로 시장 점유율과 수익으로 직결된다. 이들 기업은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에 맞춰 고성능, 저가격 제품을 전세계 유통망을 통해 뿌려댄다. 어지간한 규모의 기업들로서는 도저히 경쟁이 되지 못한다.

 결국 시장에서의 ‘쏠림 현상’이 더욱 심화돼 전세계적으로 몇몇 기업만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의 CDMA단말기업체들이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기득권을 갖고 있는 CDMA 시장에서는 통한다. 하지만 CDMA에서의 수익성은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세계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GSM시장을 뚫어야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버티고 있다. 이들과 경쟁하려면 그에 못지 않는 브랜드 인지도, 전세계 규모의 유통망,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일단 국내업체는 아직 규모의 경제에서 이들에 밀린다. 마케팅 능력도 뛰어날 것이 없다. 가격 경쟁력도 장담할 수준은 아니다.

 그래서 특화전략이 요구된다. 점유율 확대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고기능 고급제품시장을 공략한다든지, 특정 계층·특정 지역을 싹쓸이한다든지 하는 대안이 필요한 것이다. 싸구려 이미지만 앞세워 저가시장에 얼굴을 내밀어봐야 손에 쥘 것은 하나도 없다.

 반도체나 PC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한국기업들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점령하고 있다. 부동의 1위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구 현대전자)가 3위에 랭크되어 있다. 그러나 비메모리를 포함한 전체 반도체 시장 순위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인텔이 유일하게 10% 이상을 점유하면서 1위에 올라있고 삼성은 도시바, NEC에 이어 4위이며 하이닉스반도체는 10위권 바깥에 처져 있다.

 한국이 자랑하는 메모리 반도체는 대만업체들의 추격권에 들어 있고 수익성도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 하고 있다. 정작 고부가가치 분야인 비메모리시장에서 한국은 아직 주변국에 머물고 있다.

 PC산업 역시 지난해 1억3480만대가 팔렸지만 국내업체는 10위권 이내에 들지 못했다. 1720만대를 판매한 컴팩이 1위이고 국내업체로는 삼보컴퓨터가 OEM물량을 포함해 약 500만대 수준으로 10위권 언저리에 올라 있를 것으로 추정된다.

 반도체와 이동전화 단말기, PC는 한국IT산업의 견인차다. 그간의 고속 성장으로 세계 시장 진입에는 성공했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진 환경에서 초일류기업들과 경쟁해야 한다. 성장신화를 이어갈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지 전환기에 서있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