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9)초창기의 전화 명칭

우리나라에 전래된 전화의 명칭으로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청나라 사람 정관응(鄭觀應)이 지은 `이언(易言)`의 `론전보(論電報)`에 나타나는 다리풍( 釐風)이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가지고 들어온 `이언`은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종합적으로 소개한 책자로, 조선조정에서는 한문으로 되어있는 글을 한글로 번역, 출판하여 여러 사람들이 읽도록 했다.

 "이제 세인이 또 다리풍(전신선 같은 것이라)을 만들어 소식을 전하게 하니 더욱 심상치 아니한지라. 만일 다리풍 쓰기를 넓게 하며, 또 상고에게 붙여 소식을 전하게 하고 소입(所入)을 침작하여 세금을 거두면 일 이 년간에 반듯이 처음에 설치한 비용을 환수 할 것이오, 그 후에 걷히는 세금이 끊이지 않음이 무궁하리니 진실로 나라에 유익하고 백성에게 편할 요긴한 사무라, 화륜선과 양창, 대포 등의 물건은 이해(利害)가 상반되지만 다리풍과 전보는 유리무해하니 어찌 다 사용하지 아니하랴."

`유리무해(有利無害)`

 다른 물건들은 이익과 해로움이 상반되지만 이익만 있고 해로움은 없는 유리무해한 물건으로 소개된 다리풍. 전화의 영문 표현인 Telephone을 음역한 다리풍 이외에도 어화통(語話筒), 덕률풍(德律風), 득률풍(得律風), 전어기(傳語機)로 불린 기록이 있는데, 1898년 1월 24일에 나타난 전화 사용기록의 첫 부분이 덕률풍 전어(德律風傳語)라고 기록된 것이 인상 깊다.

 어화통(語話筒)은 1881년 12월 5일 영선사로 청나라에 갔던 김윤식이 귀국하여 집필한 음청사(陰晴史)의 내용 중에 1881년 12월 25일 청나라 전기국을 방문하여 전화기를 본 후 그의 일기에 `견 어화통(見語話筒)`이란 말이 기록되어 있어 전화기를 어화통이라고 불렀다는 사용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음청사에는 `전기국에 이르러 동선 끝에 매달린 어화통에 귀를 기울이니 겨우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라는 내용이 있어 김윤식은 최초로 실물의 전화를 사용한 사람으로 기록상 나타나고 있다.

 덕률풍(德律風)은 1881년 12월 영선사로 청나라에 갔던 상운(尙澐:)이 1882년 3월 12일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청국 남국(南局)에서 지급한 전기통신 기자재 중에 덕율풍 2대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그 사용근거를 찾을 수 있다. 덕율풍이란 기록은 1894년 2월 29일 당시의 조선전보총국(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을 관장하기 위한 청국 기관)에 일본에서 들여온 궁내소용(宮內所用) 전화기의 시험을 의뢰한 후 조선전보총국에서 보내온 문서와, 1904년 1월 29일 의 훈령 등 이후의 기

록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득률풍(得律風)은 1894년 2월 22일 당시 일본에서 도착한 전화기의 시험을 조선전보총국에서 공동으로 행하자는 문서의 기록으로 나타난다. 조선전보총국에서 응답 형식으로 보내온 문서에는 덕률풍으로 되어 있으나 조선조정에서 보낸 문서에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득률풍으로 표기하여 보내고 있다.

 전어기(傳語機)는 1897년 12월 31일 전신, 전어기 등의 물건을 면세하도록 총세무사(總稅務司)에게 시달하였다는 내용이 `공문거래첩(公文去來牒)`에 기록되어 있고, `한국계년사(韓國季年史)`의 1898년 10월 22일 내용에 `독립협회가 그 사무실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있는데 한 시간쯤 지난 후 위홍석이 들어와 말하기를 금일 전어기로 황제의 칙어가 있을 터이니 회장은 전어기 앞에 와 기다리라 하였으니 곧 전화 칙교가 있었다`라는 글이 있어 고종이 활발하게 전화를 사용한 기록과 그 당시 전화기를 전어기로 불렀다는 기록의 근거가 되고 있다.

 초창기 전화에 대한 명칭이 덕진풍(德津風)으로 인용되기도 하는데, 1991년 12월 17일자 `서울 600년`란의 `한성전보총국`이란 기사와 1990년 4월 24일자 `이규태(李圭泰) 코너`의 `전화애사(電話哀史)`에서 전화를 덕진풍(德津風)으로 불렀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덕진풍이란 명칭은 초창기 관련자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기사를 쓴 이규태씨가 1965년 9월 2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일요화제`란의 `전화 할아버지`라는 기사를 쓰면서 당시 유일하게 고종황제와 통화를 한 적이 있는 황우찬옹(당시 87세)을 인터뷰 한 사실이 있어, 그 당시에 전해들은 말이라고 가정할 수는 있으나 현재까지 드러난 자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전화의 명칭이 도입초창기에 어떠한 형태로 불려졌는가는 실상 중요한 일이 아니다. 또한 어떤 용어가 맞고, 어떤 용어가 틀리다는 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더욱 무모한 일이다. 다만 도입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부강의 기본이요 개화의 근원`이란 전기통신에 대한 인식이 이제 정보통신 선진국으로 도약한 우리나라의 정보통신사업의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최초로 전화를 소개하면서 다리풍으로 기록한 `이언`의 `론전보`에는 전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다음 글은 전보에 관한 내용으로, 한글로 번역된 내용을 재정리한 것이다.

 "세상에 지극히 신통하고 지극히 속하여 홀연히 갔다가 홀연히 오는 것은 대체로 번개같은 것이 없으니 번개를 빙자하여 소식을 전한 즉, 그 빠름을 가히 알지라. 옛적에 미국선비 학업을 좋아하고 생각을 깊이하며 격치지학(格致志學)을 잘하여 번개 이끄는 법을 얻고 세상에 쓰기를 이롭게 하니, 이는 전신선에 말미암아 시작한 바라.

 이제 여러 나라에서 다 전신선을 베풀어 산이 가렸던지 바다가 막혔던지 물론하고 경각간에 소식을 통하니 진실로 고금에 없는 기이함을 열고 조화로 측량치 못할 비밀함을 세상에 드러냄이라.

 양국이 틈이 생겨 서로의 의견을 양보하지 않을 때 전신선을 힘입어 군정을 전한 즉 전신선 있는 자는 많이 이기고 없는 자는 많이 패하며, 상인들이 물화를 무역할 때 전신선을 빙자하여 시세를 서로 통한 즉 전신선이 없는 자는 항상 굽 죄고, 있는 자는 항상 넉넉하니 부강하게 하는 공이 여기 말미암은지라.

 그러나 이는 오히려 태평시절을 말함이려니와 만일 양국이 서로 싸움을 결단할 때 전신선이 더욱 요긴한 것이 되니 옛적에 보(普)국과 법(法)국이 서로 싸울 때 보국사람이 행군하는 곳에 전신선을 다 베풀고, 법국 사람이 베푼 전신선은 다 보국 사람이 무너버린 바 된지라. 이러므로 법국이 패하고 보국이 이겼나니 대저 중국은 북방에 도읍 하였으매 남쪽으로 가려하면 그 거리가 멀고, 다른데도 수 천리 되는 곳이 많은지라, 봉화를 올리며 주시하는 군사를 두나 급한 일이나 겨우 보고할 뿐이오, 말씀을 능히 통할길이 없으며, 군사를 베풀어 호령을 전하나 여러 날 지체하여 그릇되는 일이 많은지라.

 해변 요긴한 곳에 포대(돈대를 모으고 포를 놓아둔 곳이라)를 두어도 전선(戰船)이 없은 즉 포대도 또한 외로와 구원이 없을 것이오, 전선만 있고 전신선이 없은 즉 전선도 또한 구원하기를 미쳐 못할 것이니, 만일 적병이 전선 둔 곳을 알고 군사를 합하여 포위할 때 실제 전신선으로 통함이 없으면 각처에서 어찌 능히 빨리 와 구원하리요."

 `전신선이 있는 자는 싸움에서 많이 이기고 경제적으로 항상 넉넉하니 부강하게 하는 공이 여기에 말미암은지라`

 그 당시에 이미 전기를 이용한 정보통신의 중요성과 효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전화기는 교환기의 종류에 자석식, 공전식, 자동식, 전자식 등으로 변경 되어왔는데, 특이한 사항하나는 1980년 말까지 관급으로 제공되던 전화기가 1981년 1월 1일 전격적으로 자급제로 변하면서 관련사업이 급속히 활성화되고 다양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전화기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 다양한 제품이 만들어 졌고, 이를 통해 세계 수출로 이어져 마침내 세계 최고의 전화기 수출국이 되었다.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자유 경쟁이 이룬 결과였다.

 이제 새롭게 열리는 인터넷 전화와 IMT 2000 사업 등, 앞으로 무한대로 펼쳐질 정보통신사업에서 우리가 지은 이름의 제품과 서비스가 다른 나라에서 번역되어 다양하게 불리워 질 수 있는 때가 도래하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김영근 : 작가/ 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