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세계적인 반도체업체가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세계적인 수준의 반도체장비업체는 없다. 그 이유를 장비업체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우리의 풍토가 일류장비업체의 탄생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장비업체들의 입지는 제도상의 허점과 소자업체들의 무관심으로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 지난해부터 시스템집적반도체 기반기술개발 5개년 사업에서 과거 전체 개발비를 수요업체가 40%, 정부가 40%, 장비업체가 나머지 20%를 부담하도록 했던 의무조항이 빠졌다. 연구개발비 공동부담 의무조항은 장비업체들이 기술자립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토대였다. 실제로 미래산업·아토 등 상당수의 반도체장비업체들이 이 조항 덕택으로 장비를 국산화할 수 있었다.
장비생산업체들은 개발지원정책에서 이 조항이 빠져 반도체장비의 국산화라는 큰 틀이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더욱이 올들어 전세계적으로 관련산업의 경기침체가 가속화하면서 은연중에 힘을 가진 소자업체들의 압력은 장비업체들을 막다른 코너로 몰아가고 있다.
반도체가격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자업체들이 고통분담을 내세워 장비가격의 인하를 요구하거나 발주된 장비의 인수마저 미루는 등 장비업체들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얼마전 한 소자업체는 장비업체의 영업책임자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장비가격을 20∼30% 인하해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반도체가격하락으로 소자업체들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갑과 을의 종속적인 관계에서 보면 열악한 중소장비업체에 고통을 전가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역경을 슬기롭게 헤쳐나가기 위한 고통분담은 충분히 이해한다 해도 이같은 일은 미래를 위해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장비업체의 한 관계자는 소자업체들은 막대한 수익을 낼 때 혼자 독식하고선 조금만 어려우면 하청업체들에 모든 것을 전가시키는 일이 국내업체들의 경영형태”라면서 이런 일이 중소업체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어 우리가 세계적인 장비업체들을 보유하지 못한 이유”라고 지적한다.
반도체 수준에 부합하는 세계적인 회사들을 키워내기 위해서라도 먼 장래를 함께 대비할 수 있는 협력체제 구축이 정말로 아쉬운 시점이다.
<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