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서 동기식이 유리한 지 비동기식이 바람직한 지 갑론을박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됩니까. 사업자들이야 시장성을 최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엔지니어 입장에서 보면 한심할 따름입니다. 남들은 벌써 4세대 표준 선점을 겨냥한 전쟁을 준비중인데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속도에 한참 뒤처져 3세대 표준 타령만 하니 답답합니다.”
지난해 차세대이동통신(IMT2000)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핫 이슈로 떠올랐던 동기, 비동기 논쟁을 두고 천경준 삼성전자 부사장이 하소연한 내용이다. CDMA는 물론 이동통신의 세계적 권위자로 인정받는 그는 현단계에서 IT업계나 정부가 최우선 과제로 추진할 것이 바로 기술표준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라고 밝혔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처럼 세계 IT시장을 주름잡는 선진국과 거대기업은 앞날의 준비를 기술표준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바둑으로 치면 서너수 정도는 최소한 내다 보며 행마를 하는 것이고 대부분의 후발기업과 나라들은 한 수 한 수 착점에 바쁘다. 미래를 예측하고 사전에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자신의 수를 한둘 세상에 선보이는 기업과 쫓아가기에도 허덕이는 회사와는 경쟁력 부문에서 원천적인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IT산업도 하루살이가 아닌 이상 앞날의 예감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 출발점은 표준 전쟁에 뛰어드는 것이다. 물론 한국정부와 한국 IT기업들이 기술표준 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우거나 흐름을 좌우할 만한 주도권을 쥔다는 것은 현실상 역부족이다.
기술표준 싸움을 주도하려면 세계적 범용 기술 혹은 원천기술을 갖고 있거나 시장 지배력이 이에 상응하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 나라로 치면 경제력이 세계 랭킹 5위안에는 들어야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다.
더구나 표준 전쟁은 총력전, 입체전이다. 기업의 기술력, 국제 표준화기구를 움직일 만한 전문인력과 대외 협상력, 해당국 정부의 국제 발언권 등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동시에 진행되어야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한국 IT업계 현실상 이 가운데 어떤 분야도 국제 무대에 자신있게 내놓을 것이 없다. 세계 최고수준의 독보적 IT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외 전문가를 육성한 것도 아니다. 정부가 국제시장에서 발언권을 인정받지도 못하고 시장 규모가 크지도 않다.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기술표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소한의 대비 태세를 갖추는 것 뿐이다.
문제는 정책 당국이나 기업의 의사결정권자들에게 이같은 마인드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무진이 혹은 엔지니어들이 아무리 기술표준 대응을 강조해도 위로 올라갈수록 ‘물건 잘 만들어 수출 많이 하면 됐지 표준 전쟁은 사치’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개념은 과거의 IT 성장과정에서 충분히 검증된 것이다. 한국 IT산업, 특히 수출을 주력으로 하는 제조업의 경우 1등주의가 아닌 5등주의를 통해 폭발적 활황세를 구가했다. IT분야에서 1등은 IBM, 모토로라, 에릭슨, 컴팩 등 이미 기술과 자본을 축적한 기업들이 하면 되고 한국기업들은 저임금에 숙련된 노동력을 바탕으로 이들 기업을 수용, 저가격 제품의 물량떼기 장사로 짭짤한 성과를 올렸다. 세계시장의 1등은 포기한 채 5등 안에만 들면 ‘먹고살만 하다’는 마케팅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5등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지켜내지 못할 상황이 됐다. 환경의 변화로 1, 2등만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이 됐다. 생존하려면 표준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비록 주도 세력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기술과 의견을 국제 표준방식에 일정 부분 투영시키지 않으면 시장에서 완전히 밀려날 처지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기술의 발전 추세, 예컨대 복합화, 퓨전화가 급속히 진전되는 IT시장을 감안할 때 모든 것이 단일화, 통합화될 것이고 그래서 표준 전쟁은 갈수록 의미가 퇴색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럴리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 의견이다. 기술표준은 단순히 산업 문제가 아니라 국제 질서를 판가름하는 정치적 의미가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국가대 국가가, 때로는 진영간, 혹은 기업간의 충돌이 표준 전쟁으로 나타나고 이는 기존 질서의 유지냐 재편이냐를 가름할 것이라는 점에서 양보도 있을 수 없고 승자와 패자도 명확지 않다. 전쟁은 누가 더 많은 영역을 확보, 상대적 우위에 서느냐이지 제로섬 게임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수십년간 지구촌 IT를 대표해 왔던 TV를 보자. 기술적으로는 단일표준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아직도 북미식(NTSC)과 유럽식(PAL)이 병존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대치상황 탓이다. 누구도 세계시장의 단일 패권을 허용하지 않는다.
3세대 이동통신을 둘러싼 동기, 비동기 싸움 역시 똑같다. 전세계 로밍이라는 원칙이 있고 기술적으로도 해결이 가능한데도 북미식과 유럽식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고 있다. 디지털 TV 방식도 그렇고 무선 홈네트워킹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국제 표준화 기구 내에서도 국가별, 기업별, 진영별로 나뉘어 으르렁거리고 있다. 표준 전쟁은 IT 다툼이라는 경제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인 것이다.
한국IT산업이 한단계 도약하려면 더 이상 기술표준 싸움의 변방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당장 세계 표준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하려는 총체적 노력이 필요하다. 생존이 걸린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정책적 뒷받침, 예컨대 국내 인사를 국제기구에 적극적으로 파견하고 이들의 위상과 입지를 확보해 줄 수 있는 측면지원, 장기적 관점에서 표준 전문가를 육성하는 방안, 국제 표준을 겨냥한 통상외교 강화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행인 것은 지난 수년간 특히 정보통신분야 전문가들이 아태지역을 중심으로 한 국제 표준기구에 진출하고 기업 대표들 역시 국제 기구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점이다. 정통부 전파연구소, 한국통신, ETRI, 삼성전자, LG전자 등의 전문가들이 국제 표준화 기구 워크그룹장을 잇따라 맡았고 한국 기술을 제시하고 있다.
글로벌 경쟁의 선두에 서 있는 IT분야일수록 이제는 기술표준 전쟁에 눈을 돌려야할 시기다.
< 이택기자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