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10)거문도 사건과 해저 통신케이블(상)

고흥 반도 남쪽 약 40㎞ 해상에 자리하고 있는 섬 거문도.

 서도(西島)·동도(東島)·고도(古島)의 세 섬으로 이루어진 거문도는 외딴 섬이지만 세개의 섬이 자연스럽게 방파제 역할을 하고 내해의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의 출입이 가능한 천연 항구로 활용되고 있다.

 토요일 오전 비행기를 타고 여수공항에 내려 쾌속여객선을 타면 당일에 도착할 수 있는 거문도의 가운데 섬(고도) 남쪽 해변가에는 해저 통신케이블이 육양(陸揚)된 흔적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하나 있다. 벌써 백년도 더 지난 역사의 흔적으로, 1885년 영국 해군이 불법으로 거문도를 점령한 후 상해와 해저 통신케이블을 가설해 전신으로 통신을 수행한 바로 그 흔적이다.

 약육강식은 19세기를 정점으로 한 제국주의적 식민지시대의 특색이었다. 특히 1880년대 중반 당시 조선은 열강제국의 세력 확장을 위한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일본과 청국, 러시아, 영국 등 세계 여러나라는 극동아시아 세력의 발판이 되는 조선에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영국 해군이 불법으로 거문도를 점령하고 섬 꼭대기에 영국기를 꽂아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날짜는 정확하지 않다. 고종실록에는 거문도 주민과의 문답을 통해 영국함대가 입항한 날을 1885년 4월 23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여러가지 자료와 당시 외국의 신문기사 등을 검토해 보면 그 이전인 4월 15일 경으로 드러나고 있다.

 영국 해군 거문도 점령 소식에 놀란 조선정부는 급히 정부당상 엄세영, 독일인으로 외아문 고문을 맡고 있던 뮐렌도르프 등을 청국 군함에 태워 5월 16일 거문도로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거문도 도민에 대한 조사결과 보고에서 처음 도착한 군함 3척과 이어 도착한 군함 3척, 상선 2척 등 모두 8척이 정박해 있다고 했다.

 또한 결과 보고에는 영국 해군의 배에는 한자로 필담을 할 수 있는 중국인 통역과 섬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일본인이 타고 있었으며, 영주할 뜻이 있는 듯 목재, 철삭 등을 잇달아 옮기고 있으며 섬 꼭대기에 게양된 영국기는 5월 10일에 세워졌다고 보고하고 있다.

 당시 국제정세는 김옥균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의 사후 수습으로 인하여 복잡하고 첨예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과 청국은 갑신정변을 계기로 입은 일본측의 손해 배상과 조선으로부터 청국 군대의 철병 등을 정한 톈진조약을 맺었다. 당시 청국은 아편전쟁의 패배와 청·불 전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고, 이런 기회를 틈타 일본은 물론 구미열강들은 청국을 강제적으로 세계시장에 끌어들임과 동시에 잠식을 시작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과 러시아도 세계패권을 놓고 여러 곳에서 첨예한 대립을 계속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갑신정변 이후 청국과 일본의 틈새를 비집고 조선 조정 내에서 그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유럽 제일의 군대로 성장한 러시아는 발칸반도와 중동지역으로 남하정책을 전개하여 서구 열강과 항쟁의 포문을 열었지만, 크리미아 전쟁 후 출구가 완전히 봉쇄되고 난 후 1860년 블라디보스토크를 강점하여 극동아시아로의 출구를 모색하고 있던 중으로 제일 먼저 부동항을 확보할 수 있는 조선이 그 목표가 되었다.

 한편 영국은 1882년 한·영 수호의 교섭이 시작되던 무렵부터 이미 거문도의 조차(租借)를 제의함으로써 거문도에 대한 관심을 표시해왔다. 또한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한국의 조정이 급속히 러시아에 접근하여 한·러 밀약을 체결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고,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싸고 긴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러시아의 극동 선점을 예방하고 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길목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영국의 동양함대 사령관 도웰 해군중장의 점령명령을 받은 프라잉 피셔호의 함장 TP 매클레인 해군대령이 프라잉 피셔호와 아가멤논호, 페가수스호 등 세척의 군함을 이끌고 조선 측에 어떠한 통고도 없이 거문도 내해에 나타나 닻을 내리는 것으로 영국 해군의 작전은 시작되었다.

 영국 해군의 움직임은 당시 세계 언론에 의해 간헐적으로 감지되었다. 1885년 3월 7일에는 영국 동양함대의 알바트로스호 외 1척이 홍콩을 떠나 어딘 가로 향했다는 홍콩발 특급 전보가 도쿄일일신문에 기사화 되었고, 3월 18일 전후하여 주일영국공사와 나가사키, 가로하마에 정박중인 영국군함 사이에 빈번히 암호전보가 교환되고 있는 것이 확인되어 기사화 되었다.

 3월 27일의 워싱턴 특급 전보로 영국 해군성이 전 함대에 출항명령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시달하였다는 기사가 보도되었고, 영국계 영자지 ‘요코하마 헤럴드’는 3월 31일자에 ‘염려스러운 것은 러시아로, 지금 특히 조선의 토지를 약탈하려 한다’는 사설이 게재되기도 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당시 청국과 일본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청국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남하를 추진 중에 있는 러시아에 대한 방어책으로 활용할 수 있고, 또 거문도에 대한 협약이 영국과 조선·청국 사이에 체결되면 청국의 조선에 대한 종주국의 관계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것에 만족한다는 입장이었다. 일본도 당시 영국과 동맹에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에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더욱이 조선정부에서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사실을 안 것도 점령한지 한달 가까이 지난 5월 10일 경으로, 그것도 영국 해군의 거문도 침략에 비판적이었던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이 전해주어서 알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그때서야 부랴부랴 조사단을 파견했던 것이다.

 영국함대가 거문도에 들어온 길은 삼도 중에 고도와 동도 사이에 있는 수도로 먼저 군함 3척이 병사들을 싣고 들어왔다. 병사들은 상륙하자마자 즉시 막사를 건설하고, 우물을 파고, 이어 포대의 설치와 병원의 건설에 착수했다.

 이어 영국 해군은 거문도와 중국의 상하이를 연결하는 해저 통신케이블을 가설했다. 통신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섬의 점령은 전술적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상징적 의미만 갖는다. 영국 해군은 우선적으로 해전 통신케이블을 가설, 통신망 확보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이 해저 통신케이블의 가설비용과 시설은 영국 정부가 부담하였지만 가설을 위한 사전 허가는 조선정부는 물론 청국에서도 받지 않았다. 그 해 5월 18일 청국에서 사후 승인을 받았는데, 영국 해군이 통신망 확보를 위해 해저 통신케이블의 가설을 얼마나 서둘렀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영국 해군의 이러한 작업에 거문도 주민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도민들은 일을 도와주면 돈도 받고 먹을 것까지 얻을 수 있었다. 금전의 지불수단으로는 중국 화폐. 돈뿐만이 아니라 거문도 주민들은 고기 통조림 등 진귀한 먹을 것들과 평소 볼 수 없었던 술, 담배, 과자류 등을 일만 하면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총동원체제로 영국군의 건설작업에 협력하였다.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 해군은 섬 주민들과 원활하게 교류했다. 섬에 병자가 발생하면 군의가 진찰하여 치료해주고 사육한 닭 등 가축도 섬 주민들에게 제공하여 이때까지 귀양지였던 거문도는 느닷없이 전혀 새로운 문명과 접하게 되었다.

 섬 전체가 동백나무로 뒤덮인 조선반도 남쪽 바다 위에 외로이 떠 있던 작은 섬 거문도. 제국주의의 각축으로 느닷없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한 거문도에는 영국군이 상륙하기 전인 1854년 4월 러시아 함대가 상륙하여 17일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이 함대에는 당시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 곤차로프가 동승했는데, 섬 주민들과 필담(筆談)으로 나눈 대화 내용과 자신이 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이야기는 다음 호에 거론한다.

 

 

 작가/ 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고은미부장 emk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