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독한 혼란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 지음, 새물결 펴냄
함께 살면서도 정이 고갈된 이른바 ‘냉담가족’이 주변에 적지 않다. 이혼률 또한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사랑전선에 이상이 있음의 방증이며 그 근저에는 기술사회적 변동이 내재돼 있다.
‘위험사회’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부인과 함께 쓴 ‘사랑은 지독한 혼란(Das ganz normale Chaos der Liebe)’은 가정생활의 중추인 부부관계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위험사회론적 진단의 외연에 해당한다.
오늘날 부부관계가 왜 위기로 치닫고 있는가.
과거에는 결혼 이후 자녀를 낳고 키우는 데 골몰하던 성인 남녀가 이제는 자신만의 주관적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다. 또 사랑의 진정한 의미나 옳게 사랑하는 방법과 같은 원천적 문제에 연연하면서 열애 대상을 찾아 헤매기 때문이다.
‘사회성’이라는 인간 본연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기초 집단인 가족은 장기간의 자활 능력 준비기간을 요하는 인류의 생존에 결정적으로 기여해왔다. 따라서 가족은 그것을 대체할 만한 기능적 등가물이 출현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존속할 수밖에 없다.
가족체계의 변화상은 ‘제도가족에서 우애가족으로(from institution to companionship)’라는 명제로서 대변되곤 한다. 전통적 가족윤리나 가족규범의 영향력이 점차 쇠퇴하는 대신, 개별적 욕구에 근거한 가족원간의 친밀성이 보다 중요시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가정에서는 식구의 심사를 헤아리는 일이 ‘가족생활의 질’을 좌우하는 관건으로 대두하고 있다. 종전에는 남편 혹은 가장의 직권으로 손쉽게 관철할 수 있었던 일들이 이제는 대화와 설득을 통해 동의를 구해야 하는 의제로서 전환돼 가고 있다.
이에 따라 과거의 전통적 부부유형 이외에 유약한 남편, 드센 아내, 친구같은 부부, 동성애 부부 등으로 애정의 관계구도는 실로 다변화하고 있다. 그 결과 결혼마저 종전의 가치를 상실해 젊은층에서는 결혼이 철칙이 아닌 선택사항으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랑에 대한 염원이 증가함에 비례해 사랑 자체가 오히려 문제시 돼 가고 있는 이같은 역설적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저자들은 보다 큰 ‘위험’을 담지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적 위험은 어떠한 성격의 것일까.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원전사고나 대기오염과 같은 생활환경의 위험이 기술발달과 더불어 고조되고 있음을 명쾌히 분석한 바 있다. 반면 이번 저작에서 벡 부부는 물적측면이 아닌 문화적 위험의 일환인 사랑의 위험을 논하고 있는데 그 역시 점증하는 환경적 위험과 마찬가지로 기술발달의 역기능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적 위험은 기술발달의 정도에 비례해 증가한다는 벡의 기본전제에 수긍한다면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선도해온 정보사회야말로 지난날 인류가 체험하지 못했던 미증유의 재난이 돌발할 가능성이 큰 ‘고 위험 시대’임에 틀림없다.
인류역사상 가장 견고하고 안정적인 사회관계의 전형으로 꼽혀온 부부간 사랑이 동요되고 있다는 사실은 경박단소(輕薄短小)를 특징으로 하는 연성기술(soft technology)의 전성시대에는 온유와 정감이 점철돼야 할 애정의 세계가 미세한 병균에 의해 고난에 처할 가능성이 높을 것임을 시사한다.
저자들은 현대인의 애정관계에 적색경보가 발동하게 된 이유를 모든 사람이 개인주의자로 자처하게 된 까닭이라고 진단한다. 즉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려는 개방적 생활양식이 널리 확산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개성화’ 경향은 문화 엔트로피를 증대함으로써 부부간 애정문제를 조정과 타협의 대상으로 상대화시키고 있다.
정보화의 문화적 파장은 사고구조, 가치관 및 행위양식의 다원화·다양화 경향으로 표출된다. 따라서 앞으로 부부간 사랑도 차츰 합의성·일치성·불변성이 아닌 이의성·차이성·가변성을 속성으로 갖게 될 것이며 일편단심, 백년해로, 이심전심과 같은 지난날의 부부수칙은 자기정체성 확인을 위한 애욕에 의해 급속히 퇴화될 전망이다.
그 결과 부부간 애정은 상수가 아닌 변수, 확정이 아닌 혼돈, 완전이 아닌 미완, 안전이 아닌 위험의 범주로 귀속될 것으로 예견된다. ‘결혼은 성소(聖召)가 아닌 전선이요, 증오의 치유소가 아닌 증오의 실천장으로서,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일상적 의례의 뒷받침 없이는 결코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팝송과 같다’라는 저자들의 진술이 바로 그같은 점을 직설적으로 대변한다.
<고려대 김문조 교수 pkim82@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