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세력확장을 위한 열강 대결의 파도는 영국해군의 점거사건 이전에도 거문도로 밀려들었다. 1853년 7월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증기군함에 의해 일본의 쇄국이 깨지면서 열강들의 움직임은 긴박해졌고, 그 과정에서 배 띄워 고기잡고 동백나무 아래 밭 일구며 수 백년을 조용히 살아온 거문도 사람들에게까지 그 파도가 밀려들었다. 1854년 러시아 함대의 거문도 기항도 그 흐름의 하나였다.
인도의 식민지화를 끝내고 1840년부터 42년에 걸쳐 중국과 아편전쟁을 일으켰던 영국이 일본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사이, 미국은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상하이·광둥으로의 동양항로 중개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일본의 개항을 서둘러 다른 열강보다 먼저 4척의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영국이 아니라 러시아였다.
차근차근 동방정책을 진행시켜 왔던 러시아정부는 즉시 극동정책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국 함대에 뒤지지 않을 원정대를 조직하고, 팔라다(Pallada) 호를 주축으로 몇 척의 군함과 운송선을 원정대로 편성했다. 당시 러시아함대 제일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프리기트함 팔라다호에는 당시 유명 작가였던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가 동행했다. 문장이 유려하고 묘사가 정확한 곤차로프의 필력을 이용하여 세기의 대사업을 기록해 두려는 의도였다.
곤차로프는 귀국 후 당시 쓴 일기를 근간으로 하여 ‘전함 팔라다’를 발표했는데,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을 부풀게 했다. 또한 곤차로프의 기록 덕분에 당시 거문도의 상황도 자세하게 소개될 수 있었다.
팔라다호는 희망봉을 돌고 인도양을 가로질러 53년 6월 홍콩에 기항, 페리 제독의 미국함대가 일본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서둘러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출발했지만 도중에 태풍을 만나 7월에서야 나가사키에 입항할 수 있었다. 4척의 미국함대가 우라가(浦賀)에 닻을 내린 지 이미 1개월이 지난 후 였다.
일본의 푸대접과 미국과의 갈등 등으로 곤란을 겪은 팔라다호는 일본으로 다시 돌아올 시간을 확보하고 조선근해의 상황조사를 겸하여 거문도로 뱃머리를 돌렸다. 곤차로프는 자신의 일기 1854년 4월 4일자에 다음과 같이 거문도(해밀턴섬) 입항시의 모습을 적고 있다.
‘마침내 4월 2일 해밀턴섬에 도착했다. 스쿠너함은 옆에 있지만 상하이에 파견한 운송선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닻을 내리자마자 선미의 최상갑판에 나가 해안을 바라보았다. 수병의 이야기로는 항구는 사용하기 쉬우나 평탄한 해안은 결코 아니라 했다.
“저건 모두 동백이군요.”
스쿠너호의 함장인 코르사코프가 말했다.
“수병은 동백나무 가지를 이용하여 해안에 만든 증기목욕탕에 들어가 있습니다.”
수병 중 몇 사람이 이미 해안으로 향했던 것이다. 나는 멀리서 해안을 바라보며 상륙을 서두르지 않았다. 여기저기 자그마한 오두막이 서로 몸을 기대듯 뭉쳐있었다. 보이는 것은 초가지붕 뿐이었다. 때때로 여기저기서 조선인이 걷고 있었는데 모두 흰 옷 차림이었다. 우리는 극동계열에 속하는 최후의 민족을 지금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 이른 것이다.’
곤차로프의 눈으로 본 당시의 거문도. 흰 옷을 차려입고 몸을 기대 듯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가집에서 살고있는 조선인들을 경이롭게 바라본 곤차로프는 보트를 타고 섬에 상륙할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들의 보트가 섬에 접근하자 여인들이 놀라 산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 남자들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 우리가 섬에 오르는 것을 막았다. 우리는 한자를 아는 통역을 시켜, 여성에게 아무 짓도 안한다, 단지 해안 일대를 산보하려는 것뿐이다고 적어 보였다. 그들은 우리들의 보행을 막지 않았지만 마을에는 가능한한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우리가 담장을 살펴보거나 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면, 그들은 우리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못들어가게 하였고, 때로는 난폭하게 밀어내기도 했다. 반대로 손으로 밀어내면 곧 온화해져서 우리의 뒤를 따라 왔다…, 그렇지만 보이는 풍경은 눈부셨다. 호수처럼 아름다운 만(灣)을 보면서 잠시 산보를 하고 나서 우리는 해안으로 돌아왔다.
해안에는 멍석이 깔려있고 두 명의 노인이 우리에게 앉으라고 했다. 주위에는 거의 모든 주민이 우리를 보러왔다. 그들은 우리를 바라보면서 옷과 머리카락, 손을 만져보는 자도 있었다. 한사람은 우리 신발을 벗겨 모두 양말까지 돌려보았다.
한자 필담으로 “나이가 몇살인가”라고 물어보았다. “30∼40세다”고 대답했지만 그들은 “그럴 리가 있나? 60이나 70세 정도는 되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이는 연장자를 존경하는 극동의 인사말이다. “당신은 80세쯤으로 보여 우리 아버지나 할아버지 연배 같군요”라고 하면 아첨하는 말이 된다.’
곤차로프는 당시 조선의 인사말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팔라다호에서는 거문도 주민들을 군함으로 초대했다. 그 내용도 곤차로프는 자신의 일기에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섬주민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하여 군함으로 그들의 대표를 초대했다. 테이블에 앉아 홍차와 빵, 럼주를 들면서 한자 필담으로 대화를 진행했다.
먼저 그들은 우리에게 어디서 온 오랑캐인가? 북방계인가, 남방계인가를 물었다. 우리는 닭, 생선, 야채 등을 원하는데 돈으로 지불할 수도 있으며 럼주, 마(麻), 면포(綿布) 등과 교환해도 좋다고 필담으로 전했다. 마을의 장로인 듯한 인물이 필담으로 쓴 글을 뿌루퉁한 표정으로 우습게도 거드름을 피우며 과장되게 노래하듯이 읽었다.’
곤차로프와 거문도 주민들의 대화, 즉 통신방식은 필담이었다. 언어는 통하지 않을지라도 약정된 부호(문자)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하고 상대편의 의사를 받아들이는 통신수단을 이용한 것이었다. 필담의 도구는 한자로 이루어졌는데, 러시아 함대는 한문을 아는 통역을 통해 거문도의 주민들과 통신을 수행한 것이었다.
남해의 작은 섬 거문도. 당시 거문도에는 한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곤차로프의 글에서도 보여지듯 거문도 주민들은 한문에 능통한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이는 영국해군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거하였을 당시 북양함대를 이끌고 영국의 불법성을 항의하기 위해 거문도를 몇차례 방문한 청국의 정여창이 주민들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학문과 문장에 능한 사람들이 많음을 보고 놀라워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정여창은 문장가들이 많다는 뜻으로 중국 사람들이 부르던 ‘거마도(巨磨島)’를 ‘거문도(巨文島)’로 개칭하도록 조선 조정에 건의했고, 조선에서는 1885년 거문진을 설치하면서 정식으로 거문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함대가 거문도에 기항했다는 소식은 섬에 상주하던 관리와 주민들에 의해 뭍과 한양의 조정으로 보고되었다. 이 보고를 듣고 내륙의 관리들이 섬에 달려왔지만 이미 러시아함대는 없었다. 팔라다호를 기함으로 한 러시아함대는 1854년 4월 19일 닻을 올려 일본의 나가사키로 떠난 후였다.
인편 이외에는 아무런 통신수단이 없었던 당시 거문도 주민들은 러시아군함과 그후 영국해군이 섬에 상륙했을 때 상황을 어떤 방법으로 보고했을까.
현재에는 뭍과 연결된 마이크 웨이브 중계시설로 한 순간에 전국은 물론 세계 어느 곳으로든 전화와 인터넷의 이용이 가능하고, 바다 밑으로는 고흥 나로도에서 제주 성산포로 연결되는 대용량의 국제 해저 광통신케이블이 지나고 있는 거문도의 통신시설을 확인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배를 타고 말을 타고 두발로 정신없이 이어 달렸을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거문도의 해저 통신케이블에 관련된 사항은 다음 호에 거론한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