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쇄회로기판(PCB)산업이 성장통을 앓고 있다. 국내 경제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던 국제통화기금(IMF)체제에서도 30%라는 경이적인 성장세를 구가했던 국내 PCB산업이 올들어 맥을 못추고 있다.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극심한 조업률 하락에 시달리고 있다. 업계 전체적으로 60% 정도의 가동률을 유지하기도 힘들다는 것. 70년대 후반 불어닥쳤던 오일쇼크 이래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게 PCB업체들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최근 3∼5년 동안 잘 나가던 국내 PCB산업 경기가 이처럼 급전직하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다름아닌 세계 정보기술(IT) 경기위축 때문이다. 올들어 미국 신경제의 대표주자였던 루슨트테크놀로지스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파산에 시달리는가 하면 인텔·마이크론테크놀로지·노텔네트웍스·모토로라·시스코시스템스·컴팩·HP·델컴퓨터·제록스·게이트웨이·하니웰·월드컴·선마이크로시스템스 등 내로라하는 북미 주요 IT 기기 및 시스템업체와 반도체업체들은 모두 감원과 더불어 대규모 사업구조조정을 벌이고 있다. 이같은 세계적인 IT시장 불황은 견조한 성장세를 구가해온 국내 PCB산업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국내 PCB산업이 세계 IT경기에 민감한 것은 우리의 PCB산업이 수출 중심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 PCB 생산실적은 20억8000만달러에 달했다. 이 중 직수출이 7억4800만달러를 차지했고 로컬수출까지 합치면 65% 정도인 13억5000만달러 어치가 해외에 팔려나간 셈이다. 이같은 수출 비중은 전자부품 중에서 반도체·디스플레이 다음으로 수출 규모나 비중에서 크다고 할 수 있다.
올해의 경우 국내 PCB 생산실적은 지난해보다 10% 정도 늘어난 23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같은 성장률은 지난 3년간 국내 PCB시장 평균 성장률 30%에 비교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그만큼 국내 PCB산업이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매년 20% 이상의 성장세를 보여온 PCB 수출은 올들어 급격히 위축, 지난 3개월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고 있다.
시스코에 다층인쇄회로기판(MLB)을 공급하고 있는 페타시스의 이영현 영업담당이사는 “지난해 과잉생산해 놓은 재고로 인해 시스코의 신규오더가 늘지 않고 있다”면서 미국 IT경기가 회복되지 않는 한 이같은 현상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캐나다 노텔네트웍스에 통신 보드를 수출하고 있는 대덕전자, 루슨트테크놀로지스에 네트워크 보드를 수출하고 있는 LG전자·서광전자,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거래하고 있는 심텍, 인텔과 거래하고 있는 삼성전기 등 국내 유력 PCB업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세계 IT경기 위축에 따른 수요 격감이 국내 PCB업계를 어렵게 하는 외부 요인이라면 업계의 설비 증설은 내부적인 요인이다.
지난 2년 동안 국내 PCB업체들은 설비 증설에 경쟁적으로 나서 국내 PCB 생산능력은 98년보다 거의 2배 정도 늘어났다. 설비를 증설, 본격적으로 가동에 들어가려는 마당에 예상치 못한 경기위축 한파를 만나 국내 PCB업계가 부진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PCB산업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우선 지금은 세계 IT시장 위축으로 어려움에 직면했으나 하반기들어 이 시장이 본격적인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고 내수경기 또한 상승세로 돌아설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주력 수출품목인 반도체와 디지털가전의 경우 미국·일본 이외에는 경쟁국이 없을 정도로 세계시장 지배력을 갖고 있어 세계 경기 회복과 더불어 국내 PCB산업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미 디지털가전 부문에서는 이같은 징후가 엿보이고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설비 과잉과 수요 격감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국내 PCB업계가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면 ‘조만간 다가올 미래’는 한국 PCB산업이 또 한번 점프하는 도약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국내 PCB업계는 ‘현재에 살기’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즉 물량이 없다고 가격 경쟁을 매개로 한 수주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기술 개발, 품질 안정, 마케팅 능력 보완에 경영 역량을 더욱 집중해 나가는 게 국내 PCB업계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와 비슷한 환경에 처한 일본·대만 PCB업계의 움직임도 예의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휴대폰·반도체·네트워크시스템용 초박판 MLB 및 패키지 기판 분야에 치중하고 있는 일본 PCB업체들은 자국내 반도체·휴대폰 업체와 전략적 제휴아래 차세대 PCB 개발 및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플립칩기판·빌드업기판·CSP·COB 등 차세대 PCB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있는 일본 PCB업체의 선점식 투자 기법은 우리 업계가 눈여겨 볼 대목이다. 특히 디지털가전 및 저가 빌드업기판의 경우 우리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중국으로 설비를 대폭 이관하는 점도 국내 PCB업계에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국내 PCB업계는 고부가가치 제품에서는 일본 본토 업체와 경쟁하고 저가 제품의 경우에는 중국에 진출한 대만·일본 업체와 경쟁해야 하는 이중의 경쟁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특히 오는 2005년부터는 ‘환경’이 세계 PCB산업계의 최대 화두로 등장할 것으로 예견되기 때문에 지금부터 친환경 설비 구축, 친환경 소재를 이용한 제품 생산기술을 확보해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금은 가격과 품질이 PCB의 구매를 결정하는 주요 잣대지만 2005년에는 ‘환경’이 구매를 결정하는 최대 변수가 되는 환경라운드 시대가 본격 개막될 것으로 점쳐지기 때문이다.
<이희영기자 hy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