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톱박스업계가 중동으로 간 까닭은?

 

 국내 세트톱박스업체들이 가장 주력하는 수출지역은 어디일까.

 미국? 유럽? 일본? 그러나 정답은 의외의 지역인 중동이다. 낙타와 사막 그리고 알라신과 석유의 지역인 중동에서 이런 첨단 디지털가전제품 수요가 있기나 할까 의아하기만 하다.

 중동지역에 들어가는 세트톱박스는 다름아닌 디지털 위성 수신기다. 중동지역은 종교와 문화의 특성상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으며 낮에는 더워서 2∼3시간씩 쉬어야 하고 밤이면 춥다. 그나마 석유재벌이나 상류층 등은 해외로 여행이라도 가지만 일반 계층은 TV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자국 정부에서 쏟아내는 뻔한 종교 프로그램이 아니라 외국의 휘황찬란한 쇼와 포르노 등을 볼 수 있다는 점에 소비자들의 수요가 폭발하고 있다. 이미 외국 위성방송사업자들은 이 점을 간파, 아랍어 더빙 방송을 내보낸 지 오래다.

 최근 아랍에미리트의 방송사업자와 제품공급 계약을 맺은 D사 관계자는 “오락거리에 목말라 있는 이들에게 위성방송수신기만한 제품은 둘도 없을 것”이라며 “걸프전 때도 세트톱박스가 낙타를 타고 국경을 넘었을 정도”라고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실제로 중동지역에서 세트톱박스 수입이 허가된 지역은 아랍에미리트연합의 두바이 정도가 고작이지만 이렇게 흘러들어간 제품은 낙타에 실려 국경을 넘을 때마다 100달러 이상씩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세트톱박스업계는 중동의 바이어들에게 물건을 공급하느라 밤잠을 설친다. 까다로운 방송사업자들이 요구하는 제한수신장치(CAS:Conditional Access System)를 탑재하지 않고 무료방송만 수신할 수 있는 단순형 제품으로도 충분히 장사가 되는 곳이 바로 중동이다.

 물론 업계가 중동으로 향하는 이유 중에는 미국이나 유럽시장의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 중동밖에는 갈 곳이 없다는 점도 한 몫하고 있다. 전국적인 유통을 통해 판매되기보다는 암암리에 거래되기 때문에 AS 등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점도 작용한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을 두고 휴맥스 등 유럽지역에서 뛰고 있는 선발업체들은 “국내업체들이 중동지역에 지나치게 편중돼 서로 제살깎이식 경쟁을 일삼는 것은 모두에게 해악만 끼칠 뿐”이라며 “우리 업체들이 중동을 벗어나 세트톱박스 시장의 본무대인 유럽과 미주지역에서 뛸 수 있을 때라야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정소영기자 s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