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의 인터넷 비즈니스 열풍이 전혀 놀랍지 않다. 벌써 10년 전에 예측했던 제3의 물결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제3의 물결은 곧 혁명이고, 혁명에는 피 냄새가 난다. 모든 게 뒤바뀌고, 신분 상승과 하락이 엄청난 속도로 일어난다. 그러나 아직 혁명으로 볼만한 징후는 별로 없다.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그쪽으로 옮겨가는 눈치 빠른 사람만 있을 뿐이다.”
2000년 3월 한국을 방문했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박사가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가 다시 한국을 다녀갔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한국으로서는 각별한, 어쩌면 자신이 예측한 미래에 대해 표본이 되고 있는 한국이기에 그에게도 각별한 방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6월 4일 ‘제14회 정보문화의 달’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한 토플러 박사는 6월 7일 청와대를 방문, 한국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용역을 받아 지난 12월부터 6개월 동안 지식정보사회에서 한국의 발전전략을 연구한 ‘위기를 넘어서:21세기 한국의 비전’ 보고서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6월 8일에는 코엑스 국제회의실에서 강연을 했다.
보고서에서는 세계적 수준에 오른 한국의 정보화 인프라를 제3의 물결의 하나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제3의 물결에는 정형화된 모델이 없듯이 세계적 수준의 정보화 인프라를 구축한 한국이 좇아갈 검증된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 만큼, 한국실정에 맞는 전략적 모형을 새롭게 구상할 것을 제안하고 있어 한국의 앞날이 긍정적임을 시사하고 있다.
“정보사회에서 새로운 부의 창출 메커니즘이 아직은 초기단계이기 때문에 한국이 따를 만한 검증된 모형은 없다. 한국의 미래는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좋은 소식은 이미 보다 진보적인 경제체제로의 과감한 첫걸음을 한국이 내디뎠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국의 정보통신기술은 훌륭한 하부구조를 지니고 있다. 새로운 하부구조의 구축을 위한 첫발을 내디딘 한국은 이 거대한 물리적 하부구조를 발명과 재발명을 통해 한국경제 전체를 위해 유익하게 사용해야 한다….
성공의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제3의 물결 하부구조 시설들이 모든 비즈니스와 사회 각 분야에서 얼마나 잘 활용되는 것이냐에 달려있다. 세계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 잘 개발된 정보하부구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그 하부구조를 몇몇 특정산업 또는 지역에 집중하기보다는 사회전반에 걸쳐 유익하면서도 혁신적으로 사용하는 경쟁력을 국가가 갖춰야 한다….
한국의 새로운 정보통신기반은 한국기업이 향후 수십 년간 확장일로에 있는 해외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다가올 정보기술과 서비스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수출국가이자 사용국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앨빈 토플러 박사의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은 각별하다. 그동안의 행적과 말을 통해 아주 오랫 동안 우리나라를 세밀히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때문에 그의 말은 우리에게 설득력을 갖는다.
2000년 4월 APEC 서울 포럼에 참석 차 방한했던 그는 “한국사회의 빠른 정보화에 감명을 받았으며, 정보화의 중추세력인 벤처기업인들의 경영 마인드, 사고방식 등을 알고 싶다”고 밝히고 국내 벤처기업인들과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앨빈 토플러는 “인터넷은 지금 시작이며 앞으로 50년, 100년간 계속 성장할 것”이라고 주장, 주가의 급등락에 마음 졸이던 한국의 벤처 기업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1999년 미국에서 있었던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는 한국이 경제위기 극복에 전력을 기울이는 와중에서도 제3의 물결을 타기 위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숲과 큰 그림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위기가 구조조정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했을 때, 단순한 구조조정만으로 한국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만으로 제3의 물결로 발전할 수 없으며, 만약 제3의 물결을 타지 못한다면 한국은 낙후되고 오랫동안 그 결과에 시달릴 수 있다”고 말하고, 이어 “한국은 혁명을 이루고 있지만, 이를 이끄는 이들이 그 결과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를 이해하고 있는 듯 싶지만, 아직 한국 국가 전체가 이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며 자신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피력했다.
또한 한국의 제3의 물결 진전 정도를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는 “한국 내에는 제3의 물결에 해당하는 것들이 포켓처럼 존재해 있다. 사회 전체가 네트워크 되어 있지 않다. PC, 웹 TV와 같이 전 가정을 인터넷에 연결하는 장치가 보다 확충돼 전자상거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전자상거래의 표준을 정하는데 국제적으로 역할을 담당해야 하고, 당장 한국의 문화에 맞는 기술을 기초한 네트워크 장치를 개발, 이를 확산시키는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 결정은 매우 중요하며,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여 구체적인 가능성과 우려를 동시에 제시했다.
앨빈 토플러 박사는 김대중 대통령과도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김 대통령은 1980년대 초 청주교도소 수감시절 읽은 토플러 박사의 저서 ‘제3의 물결’을 통해 정보화에 대한 개념을 정립, 정보화에 대한 눈을 뜨게되었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피로할 정도’로 관심을 갖게 된 기본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토플러 박사가 1997년 9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대선 후보인 김대중 대통령이 “내가 당선되면 한국의 미래설계에 대해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토플러 박사가 이를 흔쾌히 수락한 인연도 가지고 있다.” 토플러 박사는 선거가 끝난 직후 “지난 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 당선자가 집권할 경우 새 정부를 돕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고 싶다”며 자문 기회를 요청해 왔고, 김대중 대통령도 21세기 정보사회에서 고부가가치 창출을 실현시킬 수 있는 국가경영을 위해 취임 후 다시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1998년 3월 방한한 토플러 박사는 김대중 대통령을 방문, 실업대책과 정보통신산업 발전 및 벤처기업 육성방안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여기서 김 대통령은 정식으로 한국정부의 정책 자문에 응해줄 것을 요청했고, 토플러 박사도 “그러한 노력은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만큼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겠다”고 하여 그 결과 중 하나가 이번에 보고서 형태로 발표된 것이다.
우리는 가끔씩 마라톤 경기를 보게 된다. 긴 거리, 긴 시간 동안 달리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마음 졸이고 기뻐하곤 한다. 마라톤 선수들을 잘 살펴보면 한동안 선두그룹을 형성하여 달리다 한 순간에 선수 하나가 치고 나온다. 뭉쳐서 달리면 바람의 영향도 적게 받고 피로도 적어지겠지만, 치고 나오는 선수는 그 동안 준비한 모든 것을 걸고 승부를 걸게 된다. 체력과 정신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결승점까지 이르지도 못하고 경기를 완전히 포기할 수도 있지만, 그 기회를 잘 잡게 되면 비슷한 능력을 가진 선수보다 먼저 결승점을 통과할 수 있게 된다.
‘21세기 한국의 비전’에서 밝힌, “제3의 물결에서 이제 한국이 쫓아갈 모델이 없다”는 앨빈 토플러 박사의 말은 지체하지 말고 선두 그룹에서 치고 나가라는 말이다. 지금이 그 기회이며, 준비 또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잘 되었다는 말이다. 피 냄새가 나고, 모든 게 뒤바뀌고, 신분 상승과 하락이 엄청난 속도로 일어나는 혁명을 우리가 주도하라는 말이다.
토플러 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는 스스로 그 기회를 느끼고 있지 않았는가. 먼저 치고 나간 사업자가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이 정보통신사업이라는 것도,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바탕이 이미 마련되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승부처다. 그룹에 묻혀 달릴 경우보다 더 피곤하고 그 위험성 또한 더 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다 보면 영영 그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다. 이런 기회를 언제 잡아보았나. 한민족 5000년 역사 전개과정에서 이런 승부처가 마련된 적이 있었나. 언제 또 이러한 기회를 잡을 수 있겠나.
치고 나가자.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과장)
<고은미부장 emk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