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14)청일전쟁과 정보통신(상)

최근 인천 앞 바다에서 청일전쟁 당시 침몰한 것으로 알려진 ‘고승호(高陞號)’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인천시 옹진군 덕적면 울도 남방 2㎞ 지점의 해저 20m 위치에서 뻘에 묻힌 고승호를 발견, 선체와 선박 내 매장물에 대한 본격적인 인양작업을 앞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894년 7월 서해 상에서 일본 해군에 의해 격침된 것으로 알려진 고승호는 길이 72.6m의 2134톤급 선박으로, 청국 군인 936명과 포 8문, 총기 400개가 실려 있었고, 말발굽 형태의 은화 등 모두 600톤 가량(시가 1000억원)의 은괴도 함께 실려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해졌다.

 인양을 주도하고 있는 회사에서는 청나라 군인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천도제만신굿을 벌인 뒤 본격적인 인양작업에 나설 계획으로 높이 1.2m, 폭 1.5m 크기의 철제 원통을 선체 위 개펄에 박은 후 컴프레서로 뻘을 빨아낸 뒤 원통 안에 잠수부를 투입, 선체 내부의 매장물을 발굴하는 ‘우물통 공법’을 적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승호는 1883년 건조된 영국 런던의 인도지나 기선 회사 소유의 보급선으로,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청국과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청일전쟁 당시 청국에서 임대하여 전쟁에 투입,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대령에게 격침당한 비운의 선박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대령은 이후 러일전쟁 당시 연합함대를 이끌고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킨 장본인이다.

 고승호의 격침으로 시작된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조선과 청국·일본의 전통적인 국제관계를 변화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특히 일본으로서는 압박에서 벗어나 압박을 가하는 전환점이 되었고, 중국으로서는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계기가 된 전쟁이었다.

 갑신정변 후 10년, 그동안 일본은 군사력 증강을 위해 장교들을 독일 등으로 파견하고 외국인 교관들을 초빙했다. 군인과 일반인을 정보탐색을 위해 청국으로 밀파하였고, 전함의 제조에 주력하면서 일반 어부에게까지 대포를 다루는 훈련을 실시했다. 목표는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청국. 대륙진출을 위해서는 적어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한반도를 만들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청국과의 전쟁은 필연적이라는 생각에서 모든 준비를 끝내고 전쟁을 벌일 명분을 찾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갑신정변 후 부패가 극도에 달해 있었다. 조정의 외척은 그 세력을 믿고 방자한 행동과 사치를 일삼았으며, 왕실에서도 긴긴밤을 연회와 무당의 굿으로 지새웠다. 지방 관리들도 돈을 바쳐 관리노릇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이러한 와중에서 백성들은 수탈과 피폐에 허덕이고 있었다.

 1894년 봄. 결국 그동안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고부(古阜) 농민들이 군수 조병갑의 실정을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렸다. 학정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선택이었지만 사상을 바탕으로 봉기한 농민군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다급해진 조선정부에서는 청군의 지원을 받아 진압에 나섰지만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연전연패, 조선정부와 청국의 원세개는 위협을 느끼게 되어 청국에 군대파견을 요청했다. 청국과 일본간에는 갑신정변 후 체결된 천진조약이 있었다.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에는 상대국에 사실을 통보하고, 상대국도 군대를 출동시킬 수 있다는 내용에 따라 청국은 일본정부에 이 사실을 통고하였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 청국이 조선을 마치 종속국처럼 여기고 있다는 이유와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이 통고문의 접수를 거부하고 즉각 조선 출병을 시도했다.

 항해술이 미숙하여 복잡한 인천해로를 뚫고 들어설 수 없었던 청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곧바로 일본군도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일본군들은 이튿날 곧바로 서울로 입성하여 기선을 제압했다. 청국군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병력이었다. 조선정부에서는 즉각 양국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양군 모두 듣지 않았고, 양군은 본격적인 대치 상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가장 먼저 통신선로 확보에 온힘을 기울였다.

 청국군은 청국과 직접 전보통신이 가능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인천과 서울, 평양과 의주를 거쳐 청국까지 연결된 서로전선은 당시 민심의 불안으로 말미암아 절단사고가 빈번하였고, 가설 후 이미 10년이 지나 전주의 훼손이 심했다. 전신선을 관리하던 화전국에서는 선로의 보수를 위해 조선정부에 각별히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전선이 절단될 경우 신속한 출장수리를 위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연월일과 사용자란을 공란으로 두어 발급하는 마표(空白馬禁)를 조선정부로부터 미리 발급받아 대비하였다. 본격적으로 청국군이 상륙한 후에는 선로 연변에 대기소를 마련하고 전신 기술자를 배치하는 등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전선 보수공사와 더불어 조선정부에 조선전보총국(조선정부의 전기통신을 관장하던 기구)으로 하여금 빠른 시일 내에 천안에 전보분국을 설치하게 하고 아산에 이르는 지선을 가설하게 하였으며, 청국군의 주둔지인 아산과 한성간 군용전선도 가설했다.

 한편, 일본도 서울과 부산간 가설된 전신선 확보에 노력했다. 부산까지 연결된 전신선은 동학군이 점령하고 있던 전주지방을 지나게 되어 통신이 원활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일본은 자체적인 전선 가설계획을 수립하면서 한편으로 조선정부에 전신선의 보수를 강력히 요구했다.

 ‘남로전선이 자주 불통상태에 빠짐은 조선의 해외전보를 부산해저전선에 연결시키기로 한 부산구설해저전선조약에 위배되는 바이니 조선에서 신속히 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귀국에서 이에 주력할 여지가 없으므로 일본이 기술자를 파견하여 즉시 수리하고자 한다. 이러한 조치는 조약의 본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며, 또 양국의 통신을 모두 신속케 하는 바이니 양해하기 바란다’면서 조선정부에 전선의 수리를 요구하고, 그들의 야전 통신대를 투입하여 조선의 전신선을 수리하겠다는 부당한 요구를 조선정부에 해 왔다.

 이에 조선정부는 ‘현재의 남로전선 불통은 풍우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며, 그것은 우리의 기술자와 지방관의 힘으로도 10일 이내에 능히 개수할 바이니 과히 염려하지 말라’고 일축하였다. 남로전선은 1888년 조선의 자체적인 힘으로 가설한 서울과 부산을 잇는 전신선의 명칭이다.

 일본은 거듭 자체적인 전선의 가설을 승인하라고 요구해왔다. 이미 야전 전신대 800여명을 일본과 부산, 인천에 상륙시켜 놓고 있었다. 결국 일본은 1894년 6월 17일 ‘명일부터 부산, 대구, 충주에서 군용전선 가설에 착수할 것이다’고 일방적으로 조선정부에 통고하고 군용전선 가설을 시작했다.

 이에 앞서 일본은 인천과 서울간 군용전선도 불법으로 가설하였는데, 이미 진주해 있던 통신병들에 의해 가설되었다. 가설 과정에서 일본의 군용전선이 외국의 거류지(居留地)를 무단 통과하여 국제적인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조선정부에서는 일본이 가설한 인천과 서울간 군용전선에 대하여는 이렇다할 입장 표명이 없었다. 이를 단순한 군사 행동의 일환으로 판단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군용선은 이후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반환되지 않고 철거되지 않아 일본이 우리나라 전기통신사업권을 침해하는 근원이 되었다.

 1894년 7월 25일 아침. 청국군 2차 증원군을 실은 ‘고승호’가 호위함 ‘조강호’와 함께 중국 천진 태고항을 출발한지 이틀만에 한반도 서해안 지역에 다다랐다. 이와 비슷한 시각에 아산만에서 청국 해군의 순양함 ‘제원호’와 ‘광을호’가 고승호를 맞이하기 위해 출동했다. 제원호와 광을호가 풍도 앞바다에 도착했을 때 먼 남쪽 해상에서 북상해 오는 일본군함 세척을 발견했다. 청국 증원군의 파견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은 일본의 제1유격함대였다.

 이제, 청국과 일본은 서로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과학관 관장)

 

 

 

  <고은미부장 emk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