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타워]미국의 디지털 패권시대

 ◆IT산업부 이택 팀장 etyt@etnews.co.kr

최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에셜론이 일본의 외교 전문을 감청했다”는 한 전문가의 주장을 보도해 한동안 법석을 피운 바 있다. 뉴질랜드에 있는 정부통신안전보장국이 일본의 외교 전문을 감청, 에셜론 총괄본부가 있는 미 국가안보국(NSA)으로 보냈다는 니키 해거(에셜론 연구가)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즉각 “외교 전문 교신은 극비 전자통신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타국 정보기관의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반박했지만 지난해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에셜론의 존재를 다시한번 부각시킨 사례로 볼 수 있다.

 ‘특수부대’ ‘삼각편대’라는 뜻을 가진 에셜론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유무선 통신은 물론 인터넷·팩스까지 감청할 수 있는 정보감시망이다. 미국 NSA가 주도하며 영국·호주 등 미국의 맹방들이 참여한 에셜론은 하루평균 30억건의 각종 통신을 가로채고 인터넷 통화량의 90%까지 감청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어마어마한 능력의 보유자다. 예컨대 우리가 통화 중 혹은 전자우편 내용 중에 무심코 ‘대통령’ ‘전쟁’ ‘테러’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면 지구상 어느곳에선가 반드시 이를 정확히 감청, 정보기관이 사실관계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냉전시대 군사 첩보용으로 활용되던 에셜론이 정보시대를 맞아 오히려 특정 국가의 민감한 정치적 이슈나 무역동향, 심지어 기업과 개인의 비즈니스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감청해 이를 체제 보위가 아닌 특정 이해집단에 지원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EU는 미국이 에셜론을 통해 역내 기업의 산업정보를 빼내고 이를 미국기업에 전달했다며 조사단을 보내기도 했다.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지구상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이 최첨단 군사기술을 자국 기업의 비즈니스에 지원하거나 무역분쟁의 유리한 조건으로 활용한다면 ‘세계 경찰 미국’의 도덕성에 먹칠을 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던 미국은 이제 금융과 정보기술(IT)을 앞세워 21세기 정보시대에서도 지배력을 유지·확대해 나가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미국의 디지털 패권주의’라고 부른다. 총칼에서 압도적 IT기술로 옷만 갈아 입었을 뿐이고 디지털 경제 질서가 미국 단일 지배체제로 재편될지 모른다며 우려하고 있다. 더욱이 에셜론 같은 감시망이 이를 뒷받침한다면 그 걱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21세기 디지털 대통령은 부시가 아니라 빌 게이츠라는 역설이 나오는 배경도 따지고 보면 지구촌 가족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정보단말기가 MS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빌 게이츠가 이 네트워크를 통제할 수 있는 ‘빅 브러더’에 가장 가깝게 다가선 인물로 꼽히기 때문이다. 물론 빌 게이츠는 미국인이고 인터넷을 비롯, IT시장을 지배하는 인물의 90% 이상이 미국인이다.

 디지털 패권주의가 무서운 것은 전세계인의 일상을 한 곳에서 조종·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해도 ‘힘’을 가진 자는 늘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정의감과 도덕성이 요구된다. 이를 상실하면 그것은 제도적 폭력이 된다. 그것도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