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프로세서 30년>중대형 CPU시장-인텔 VS 非인텔 `패권경쟁` 점화

 최근 컴팩은 ‘알파’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을 인텔에 매각했다. 중대형 컴퓨터업계는 이 조치를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컴팩이 세계 컴퓨터 시장의 마지막 노른자위인 중대형 컴퓨터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 인수했던 DEC로부터 물려받았던 ‘알파’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컴팩이 DEC를 인수한 것은 DEC의 코아테크놀로지라 할 수 있는 ‘알파’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있었기 때문. 이처럼 보배처럼 여겨온 ‘알파’를 눈물을 머금고 팔아 치우게 된 것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중대형 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의 생리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컴팩의 ‘알파’사업 정리는 세계 중대형 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 패권을 잡기 위한 대혈전의 서막에 불과하다. 앞으로 제2, 제3의 ‘알파’가 나올 수 있다.

 최근 4∼5년 동안 초호황을 구가해온 미국 중대형 컴퓨터업체들은 급작스런 세계 정보기술(IT) 산업 침체 여파로 매출 격감에 시달리면서 컴팩·HP·델·선마이크로시스템스 등은 대규모 감원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사업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컴팩의 ‘알파’사업 매각은 그같은 사업구조조정 작업의 신호탄이다.

 이같은 세계 중대형 컴퓨터 산업 조류에 비추어 볼 때 중대형 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둘러싼 업체들간의 ‘영토 빼앗기 전쟁’은 이제 본격 점화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더구나 수년전부터 중대형 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 공략을 선언하고 총력을 경주해온 인텔이 올해 ‘아이테니엄’ 출시를 계기로 이 시장 잠식에 본격 나서 중대형 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 주도권 싸움은 ‘인텔 대 비인텔’의 경쟁 구도로 바뀌고 있다.

 사실 인텔은 지금까지 중대형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 분야에서 조연에 불과했다. 인텔이 PC시장에서는 맹주로서 군림하고 있지만 중대형 컴퓨터시장에서는 골목대장에 지나지 않는 대우를 받아왔다. 중대형 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 시장은 진입 장벽이 높았다.

 인텔이 PC시장을 평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대형 컴퓨터 시장에서는 말석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은 중대형 컴퓨터 역사와 시장 구조에 기인하고 있다.

 IBM·유니시스·후지쯔·HP·선마이크로시스템스·컴팩·SGI 등 쟁쟁한 업체가 버티고 있는 중대형 컴퓨터 시장은 그동안 업체들마다 저마다의 영역을 차지하는 ‘봉건시대의 봉토’처럼 형성돼 왔다.

 중대형 컴퓨터업체들은 ‘경쟁과 담합’으로 시장 균형을 유지해 왔다. 즉 IBM은 자사서버(RS/6000=현재는 e서버)에 자사 마이크로프로세서(파워PC)만을, HP는 자사서버(HP9000)에 자사 마이크로프로세서(PA-RISC)를, 선마이크로시스템스는 자사서버(엔터프라이즈10000)에 자사 마이크로프로세서(SPARC)만을 각각 탑재하는 식이다.

 수십년간 철옹성처럼 닫혀있던 중대형 컴퓨터 시장에 ‘변방의 기사’에 불과하던 인텔이 ‘앙시앵 레짐’에 시달려온 독립 프로그램개발자(ISV)를 이끌고 혁명의 기치를 내건 것이다.

 ‘과중한 비용에다 한번 구매하면 중대형 컴퓨터 벤더에게 끌려다녀야만 하는 기업 컴퓨팅 환경의 종속성을 끊어낼 수 있다’는 대의명분을 내건 인텔의 전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인텔의 펜티엄칩을 탑재한 ‘윈도NT서버’는 숫자면에서는 전체 중대형 컴퓨터 시장을 압도했고 일부 미드레인지급 서버에서도 괄목할만한 보급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소형서버에서 재미를 본 인텔은 내친 김에 IBM·HP·선마이크로시스템스가 향유해온 대기업 컴퓨팅(일명 엔터프라이즈서버)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 선봉은 ‘아이테니엄’. 그러나 중대형컴퓨터 시장의 맹주 중에 하나인 HP를 연합군으로 끌어들여 공격에 나섰던 인텔의 저돌성도 이제는 다소 힘에 부치는 듯하다.

 범용형명령세트컴퓨터(CISC) 설계 기술과 명령어축약형컴퓨터(RISC) 설계 기술을 접목한 본격 6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일명 IA64)라는 장점을 내세워 중대형 컴퓨터 시장 잠식에 나섰지만 ‘IA64’칩의 출시 시기가 인텔이 공언했던 것보다 지체되고 ‘전략적 동맹’을 선언했던 HP마저 ‘아이테니엄’ 일변도에서 본래의 고향인 ‘PA-RISC’로 회기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IBM·선마이크로시스템스 등은 ‘아이테니엄’에 대응한 본격 6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인 ‘파워PC4’, ‘SPARC3’를 잇따라 출시함과 동시에 자사 서버에 탑재하기 시작, 대변혁을 일으킬 것 같던 중대형 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은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질풍노도처럼 중대형 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공략해 나가려던 전략에 차질을 빚은 인텔은 부랴부랴 차선책 마련에 나서게 됐다. 이 일환이 컴팩의 ‘알파’사업 인수다.

 물론 ‘알파’인수로 인텔은 중대형 컴퓨터시장의 6대 맹주 중에 하나인 컴팩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전과를 올렸으며 메인프레임의 명가인 유니시스·후지쯔

·SGI를 원군으로 삼을 수 있게 됐다.

 인텔이 ‘알파’를 인수, 컴팩을 자기 우산 아래 끌여들였다 해서 중대형컴퓨터 시장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기는 아직 시기 상조다.

 기실 컴팩은 소형 서버인 ‘윈도NT서버’ 부문에서는 1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알파칩을 기반으로 한 대형 엔터프라이즈 서버 시장에서는 IBM·HP·선마이크로시스템스 등 전통 강호에게는 뒤처지고 있다.

 특히 ‘SPARC-솔라리스’베이스의 선마이크로시스템스는 저가 전략을 통해 ‘윈도NT서버’가 중대형컴퓨터 시장을 파고드는 데 있어 수문장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문제는 ‘알파’의 장래. 인텔이 2000년대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알파칩’을 개발·공급한다고 선언하고 있으나 ‘알파칩’은 사실상 ‘화려한 옛 영화’를 뒤로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또 중대형 컴퓨터 시장 속성상 미래가 불투명한 곳에 투자할 기업이 별로 없기 때문에 ‘알파칩’기판 중대형 서버는 이제 니치 품목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결국 ‘알파칩’ 베이스의 중대형 서버가 차지해온 시장을 인텔의 ‘아이테니엄’베이스의 중대형 서버가 차지하기보다는 ‘SPARC’, ‘PA-RISC’, ‘파워PC’칩 베이스의 선마이크로시스템스·HP·IBM이 차지할 공산이 더욱 크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같은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우려한 컴팩은 앞으로 컨설팅·서비스 전문업체로 변신해 나가는 것과 동시에 ‘디지털 유닉스-알파칩’베이스의 서버를 사용하고 있는 기업 고객에게 특화된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컴팩의 전략이 주효하려면 그동안 충성스러웠던 ‘알파 마니아 ISV’들이 이탈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중대형 컴퓨터 시장에서 ‘옛주군’에 충성을 맹세할 ISV가 과연 몇이나 될까.

 IBM·HP·선마이크로시스템스 등 유닉스 서버 시장의 맹주들이 ‘아이테니엄’에 대응한 64비트칩 베이스의 서버를 경쟁적으로 출시, 인텔의 전략에 다소 브레이크가 걸린 듯 싶으나 예상치 못했던 백기사가 등장해 다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인텔의 백기사는 다름 아닌 리눅스. ‘컴퓨터의 자유주의’를 선언하고 나선 리눅스는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은 컴퓨터 환경의 구현을 목표로하고 있다. 이같은 이념을 바탕으로 한 리눅스의 출현은 사실 ‘인텔 대 비인텔’이라는 중대형 컴퓨터 시장의 도식적 경쟁 구조 분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왜냐 하면 운욛체계(OS)와 중앙처리장치(CPU)가 마이크로소프트·인텔 일변도로 굳어진 PC 시장과 달리 중대형 컴퓨터 시장에서는 OS와 ISV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즉 어느 벤더가 안정적이고 경쟁력 있는 OS를 개발하고 ISV를 거느리고 있느냐가 중대형 컴퓨터 시장을 장악해 나갈 수 있느냐를 판가름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중대형 컴퓨터업계는 그동안 전용 OS에 전용 ISV 전략을 추진, 이방인의 범접을 근원적으로 차단해 왔다. 물론 중대형컴퓨터업체들은 ISV들에게 고율의 이윤을 제공, 충성스런 동반자로 남게 했다.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월등한 경쟁력을 지닌 인텔도 이 벽앞에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 정도.

 리눅스의 출현은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ISV들에게도 균열의 조짐을 보이게 한 것. 운용체계의 소스코드가 공개된 리눅스의 경우 응용애플리케이션 개발 부담이 적고 때문에 수많은 ISV들이 이 리눅스 진영에 가담하고 있다.

 운용체계와 CPU에 독립적인 응용애플리케이션이 대거 출현한다는 것은 인텔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지원세력이다.

 리눅스가 전용 OS를 보유한 중대형컴퓨터업계가 수십년간 지배해온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자 IBM·HP·SGI등은 자사칩에 리눅스를 지원하는 기능을 탑재하겠다고 경쟁적으로 발표했다. 심지어 세계 컴퓨터 시장의 ‘거인중에 거인’인 IBM은 리눅스를 자사 모든 중대형 컴퓨터에서 지원되도록 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설 정도. 자존심 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IBM이 리눅스에 백기를 들 정도면 리눅스의 파괴력은 더 이상 설명이 불필요할 듯하다.

 중대형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 패권 기상도가 이처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인텔은 전통 우군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XP’에 차세대 마이크로프로세서인 ‘매킨리’를 묶어 또다시 총공세를 펼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윈텔’이 신병기를 들고 나온다면 IBM과 선마이크로시스템스도 신병기로 대응한다는 전략인 듯싶다.

 IBM은 최근 1㎓의 클록스피드를 지닌 차세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출시, 클록스피드로 경쟁해 오고 있는 인텔을 견제하고 나아가 100㎓대의 차차세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오는 2004년에 선보이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인텔의 창시자이자 반도체 기술 진보 이론의 선구자인 ‘무어의 법칙’은 다시 써야 된다는 게 IBM의 설명.

 선마이크로시스템스도 내년에 ㎓대의 ‘SPARC4’를 선보여 중대형컴퓨터 시장에서의 우위를 지켜나간다는 복안을 마련해 놓고 있다. 이에따라 세계 중대형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 패권을 놓고 벌이는 반도체 업체의 대혈전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를 전망이다.

<이희영기자 hy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