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식 한솔CSN 사장
니컬러스 네그로폰테의 저서 ‘디지털이다’에 ‘종이책의 패러독스’라는 제목의 서문이 있다. “아톰(atoms)에서 비트(bits)로 변화하는 추세는 돌이킬 수도 막을 수도 없다”고 서문을 장식한 네그로폰테는 “아톰은 과거의 것이고, 비트는 미래의 것이다”는 말로 디지털시대를 예고했다.
1996년은 디지털시대의 원년으로 기록된다. 지난 96년을 시작으로 IMF를 거치는 99년까지 혹독한 IMF 회오리 속에서도 벤처기업 등 디지털업종은 호황이었다. 그러나 IMF를 지나고 구조조정과 거품론이 고개를 들면서 호의적인 견해를 펼치던 전문가들조차 비판적으로 돌변하게 됐다.
필자는 95년부터 디지털산업의 성장을 예상하고 전자상거래와 물류의 사이버화를 통해 e비즈니스를 주도해온 한 사람으로서 현재의 이런 세태에 가슴 아프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가 21세기 강대국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디지털밖에 없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지난달 일본 출장길에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협력업체 몇 곳을 견학하게 됐다. 일본의 자동차산업은 자동화 설비라인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 내부를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일본은 비트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이 아니라 아톰을 중심으로 한 아날로그가 자리잡고 있었다. 기존의 자동화 라인을 사람으로 대체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사람이 로봇보다 생산성이 더 높다는 이유에서다.
예전에는 일본의 많은 기업들이 품질관리(QC)활동을 통해 생산성 효율화를 꾀했다. 사람은 기계보다는 불량률이 높을 수밖에 없고 인건비 상승,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생산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자동화 설비라인으로 대체하면서 생산성이 높아지게 됐다. 이런 추세가 전세계적으로 모범사례로 꼽히게 되면서 80∼90년대의 일본 산업은 미국·유럽 등을 앞서는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그러나 일본은 디지털 중심의 자동화 라인을 버리고 아날로그에 의한 예전의 인력구조 중심의 산업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실제로 사람의 동작분석 등을 철저히 계산하고 분석한 결과 기계나 로봇보다 사람의 생산 효율화가 높게 나타난다는 결론에서다.
물론 여기에는 TPS(Toyota Productivity System)방식이란 성공적인 모델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방식은 인력구조에 따른 정(情)을 핵심으로 한 철저한 일본식 아날로그를 지향하고 있었다.
여기서 비교해 보아야 할 부분은 미국경제의 핵심인 디지털경제체제다. 미국의 디지털경제에서 코스트 경쟁력은 기존 아날로그경제체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위에 있다. GM·포드·크라이슬러 등의 자동차 제조3사가 ‘코비센터’라는 기업간(B2B) 전자상거래 사이트를 만들어 원자재의 공동구매를 통해 매출액의 6.5%를 절감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원자재 구입에 따른 비중이 60%를 넘는 상황에서 판매이익은 겨우 2.5%에 이른다. 따라서 인건비 절감 등 사람에 포커스를 맞춘 생산성 향상은 미국의 ‘코비센터’ 같은 온라인을 이용한 원료나 자재의 공동구매를 통한 생산성 향상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얼마 전 한국전산원이 발표한 ‘2001년 국가정보화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정보화지수는 17위로 홍콩(11위), 대만(12위), 일본(16위) 등 주요 경쟁국보다 뒤떨어지고 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일본경제연구센터가 EIU자료를 취합해 발표한 국가별 e비즈니스 경쟁력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현재와 미래의 e비즈니스 경쟁력이 미국이 공통 1위를 차지한 반면 일본은 현재의 경쟁력은 21위지만 미래경쟁력은 16위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경쟁력뿐 아니라 미래 경쟁력조차 20위권 밖에 있어 너무 대조적이었다. 우리나라는 e비즈니스 선진국이라는 자체 평가와 너무 달랐다. 디지털산업구조, e비즈니스를 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이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이 한순간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이제 바로 인식을 하고 눈을 떠야 한다. 디지털경제와 벤처거품론이 한데 어우러져 비판과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분위기가 정부에서 추진하던 벤처기업 육성이나 디지털경제 확산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된다.
지금이 디지털 강국으로 앞서갈 수 있고 또 일본경제를 앞지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코스트와 서비스 경쟁에서 아날로그는 디지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경영합리화와 국가경쟁력 향상의 중심에는 ‘비트’를 최소 단위로 하는 디지털이 있어야 한다. 디지털 세계는 더 이상 테크놀로지만의 세계가 아니다. 디지털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화이며 거역할 수 없는 일상인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그래도 디지털이다’는 결론을 과감히 외칠 수 있는 것이다.
한솔CSN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