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조명이 교차하는 사각의 링, 경기를 기다리는 관중들의 함성이 떠나갈 듯하다. 열렬한 환호 속에 등장한 오늘의 도전자는 강철 갑옷과 강력한 집게발로 무장한 ‘래이저’.
이에 맞서는 홈 경기장의 터줏대감 ‘킬러롯’은 280㎏이라는 육중한 몸무게에 날카로운 절단기와 창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고 불꽃 튀는 혈투 끝에 결국 래이저가 불구덩이에 빠지면서 킬러롯의 승리가 선언된다. 경기장에는 부서진 금속조각과 화염 방사기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처절했던 전투를 말해준다.
흡사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전차전투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경기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로봇전사다. 게임 캐릭터도 아니고 프로레슬러도 아닌 ‘진짜’ 로봇이 금속성 굉음을 내며 눈앞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정보통신 전문채널 e채널이 최근 방영중인 ‘로봇워(Robot War)’(월∼금 18시 30분)는 이처럼 현실감 있는 액션을 보여준다는 점만으로도 시청자들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린다.
‘로봇들의 전쟁’이라는 제목만 듣고 어릴적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놀았던 ‘마징가Z’나 ‘우주소년 아톰’같은 귀여운 장난감 로봇을 상상하면 오산이다.
어른 키에 조금 못미치는 길이에 무게도 최소한 100㎏을 넘는 강철 로봇들의 엄청난 파괴력은 한여름 무더위를 날려버릴 정도로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것은 과격함 때문만은 아니다.
매주 새롭게 업그레이드되는 도전 로봇들과 이에 대항하는 일명 ‘하우스 로봇’들의 다양한 개성을 엿보는 것도 커다란 매력이다.
금속 송곳니, 둥근 톱날, 쇠사슬톱 꼬리, 360도 회전 화염방사기 등 상상을 초월하는 무기들의 향연은 그 자체로 흔치않은 볼거리다.
이 때문에 영국 BBC2에서 수백만명의 시청자를 사로잡았던 이 프로그램의 인기는 국내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최근 ‘로봇워’ 관련 게시판에는 ‘로봇’ 마니아를 자처하는 열성팬들이 넘쳐난다. 프로그램 홈페이지를 제작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로봇에 대해 전문가 뺨치는 정보를 올리는 것은 기본이다.
한술 더떠 직접 로봇을 제작했다는 이들이 하나둘 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열화같은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e채널은 국내에서도 로봇들의 전쟁을 추진할 계획을 조심스럽게 검토중이다.
e채널 박은님 PD는 “고등학생들이 직접 로봇을 제작할 정도로 국내기술도 이미 수준급”이라며 “가을쯤 국제 대회에 출전할 대표 로봇을 뽑는 이벤트를 진행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