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재회사가 세계 최고의 이동통신단말기 제조업체로 변신한 핀란드 노키아. 한때 ‘한국의 노키아’를 꿈꾸며 정보통신사업에 그룹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한솔그룹은 이제 새로운 기로에 서있다. 당장 목전에 두고 있는 그룹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고 21세기 생존발판을 제공할 신수종사업을 발굴, 육성하는 것이 당면한 숙제다.
짧게는 오는 2003년까지 전 계열사의 경상이익을 10%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 적어도 앞으로 1년내엔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을 완료해 중장기 플랜을 마련해야만 가능한 구상이다. 정보통신사업의 꿈을 접은 한솔이 조만간 경쟁력이 퇴색될 수밖에 없는 제조업을 딛고 펼쳐갈 미래상에 관심이 집중된다.
◇한솔의 비전=한마디로 생명기술(BT)과 정보기술(IT)을 양대 축으로 한 사업구조 재편이다. 제지로 상징되는 한솔그룹에 BT가 향후 신수종사업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다소 의외. 하지만 이같은 무게중심 옮기기는 이미 조용하지만 강력한 힘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룹 모기업인 한솔제지는 최근 생물사업 추진 특별전담팀(TF)을 대표이사 직속으로 구성하고, 산하 연구소인 한솔기술원을 중심으로 신기술 발굴작업에 착수했다. 그동안 축적해 온 제지분야의 환경·생명공학 관련기술과 노하우를 십분 발휘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솔제지는 생물 및 환경 엔지니어링 사업을 주력 분야로 육성키로 하고, 오는 2005년까지 전체 예상매출 1조8000억원 가운데 2000억원을 여기에서 벌어들일 계획이다. 이 기간 동안 투입할 연구개발(R&D) 예산이 2000억원에 달한다는 점에서 결코 막연한 기대는 아니다. 제지 관련 약품 및 필름 생산 계열사인 한솔케미언스는 지난 99년말 생명과학연구소를 설립, 바이오 벤처기업 9개에 지분투자 및 공동연구를 진행중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60억원의 벤처투자를 단행한 데 이어 올해는 150억원을 예상하고 있고 장기적으로는 자체 생산라인을 갖추는 것도 추진중이다. 중밀도섬유판(MDF) 생산업체인 한솔포렘은 3만헥타르(ha) 규모의 호주·뉴질랜드 조림사업을 바탕으로 수종의 2차 추출물을 응용하는 기술을 개발중이다. 지난해 임업연구원과 공동 연구협력을 맺고 현재 무공해 농약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솔엠닷컴의 매각으로 다소 사드라든 분위기지만 IT는 여전히 한솔그룹이 차세대 유망사업으로 욕심을 버릴 수 없는 분야다. 각각 연매출 3440억원과 3370억원에 달하는 한솔CSN과 한솔전자, 그리고 아직은 1000억원에 미치지 못하는 외형이지만 IT 전진부대라할 수 있는 한솔텔레컴이 그 주역이다. 모니터가 주력인 한솔전자의 하드웨어(HW), 전자상거래(EC) 선두기업인 한솔CSN의 유통·물류 노하우, 컴퓨터통신통합(CTI) 등 한솔텔레컴의 시스템통합(SI) 역량이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것이란 기대다.
◇어제와 오늘=지난 91년 삼성그룹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한 한솔은 제지업을 기반으로 비교적 순탄한 항로를 걸어왔다. 지난 2일 공정거래위원회 발표 기준 30대 그룹 가운데 한솔은 현재 자산순위 16위. 지난해 기준으로 16개 계열사의 전체 매출은 3조원을 넘어선다. 이 가운데 주력은 역시 한솔제지. 한솔제지는 지난해 매출 9540억원으로 그룹 전체 매출의 3분의 1 가량을 벌어들였다. 한솔케미언스·한솔포렘·한솔파텍·한트라(옛 (주)한솔) 등 제지 관련 계열사 매출도 1조원을 넘어서 결국 지금의 한솔그룹은 ‘종이’가 먹여 살리고 있는 셈이다. 한솔은 특히 ‘단일’ 후계구도가 대부분인 타 그룹사와 달리 ‘삼각체제’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의 맏딸인 이인희 고문의 장남 조동혁 부회장(51)이 금융·생명과학 부문을, 차남인 조동만 부회장(48)이 정보통신 부문을, 삼남인 조동길 부회장(46)이 제조분야를 각각 책임지면서 후계구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룹 차원의 새로운 기회였던 PCS사업 진출은 결국 지금에 와서는 지난 5년여간 타 계열사들의 사업강화와 신규 사업확장에 필요한 힘을 소진시킨 위기가 돼 버렸다. 엄청난 정보통신 투자가 단행됨으로써 그룹 전체의 유동성 위기를 맞기도 했던 한솔은 지난 몇년간 숨가쁜 구조조정을 거쳤다. 캐나다·노르웨이 등 다국적기업들과 공동 설립한 팬아시아페이퍼의 사업부문 및 지분매각, 지난해 한솔엠닷컴의 매각, 제지 계열사들의 증자 등이 때마침 성공적으로 수행되면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남아있는 구조조정과 불투명한 신수종사업=발등에 불은 역시 구조조정의 난관이다. 그룹 모기업인 한솔제지의 경우 지난 3월말 현재 총 차입금 규모는 1조9000억원. 지난 6월 팬아시아 지분 매각대금으로 약 4600억원이 유입됐고 현재 SK텔레콤 81만주도 보유하고 있지만 엄청난 부채를 메우기가 여의치 않다. 삼성증권 김기안 애널리스트는 최근 “또한 한솔제지의 경우 출자총액제한제도에 의해 계열사 출자지분 매각 압력이 있는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매각대상 계열사가 대부분 부동산 관련 업체이며 자산규모가 크기 때문에 현재로선 구조조정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분석했다.
특히 당장 구조조정의 벽을 넘는다 해도 BT·IT라는 차세대 신수종사업의 육성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BT의 경우 제지분야의 특화된 노하우와 R&D 역량이 있다곤 하지만 생물·환경 기술개발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엄청난 투자와 시행착오가 따를 것으로 우려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솔CSN·한솔전자·한솔텔레컴 등 IT 계열사들은 당장 각 분야에서 선두 기업으로 부상하는 것이 숙제다. 한솔CSN은 사이버 유통·물류사업에 안정된 기반을 갖추곤 있지만 현재 성장성은 정체되고 있는 게 사실. 여기다 모니터라는 주력상품이 있는 한솔전자도 제조업의 경쟁력인 외형이 지금으로선 미미하다. 한솔텔레컴도 전형적인 백화점식 SI사업으로는 현재의 왜소함을 벗어나기 힘들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