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 정태형
77년 서울대학교 졸업
78∼81년 KIST 연구원
86년 미 텍사스 공대 이학박사
86∼89년 미국 일리노이대 연구원
89년∼현재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
99∼2000년 디스플레이 조합 선행 기술 정보 교류회 유기EL분과 위원장
전통적으로 전자 소재로서의 고분자 재료는 전기를 흐르지 않게 하는 부도체 성질을 이용한 응용에 많이 치중돼 왔다. 반도체 소자의 패키징 재료나 포토레지스트 재료들이 이러한 범주에 속할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분자 재료도 전기를 통할 수 있다는 전도성 고분자의 출현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다.
전도성 고분자는 77년 일본의 히데키 시라카와 교수 팀이 우연한 계기로 폴리아세틸렌을 합성하고 이 고분자가 산화도핑에 의해서 금속 수준의 전도도까지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보고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 산타바바라대의 Alan J. Heeger와 펜실베이니아주립대 Alan G. MacDiarmid 교수는 전도성 고분자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앞의 세 교수들은 전도성 고분자 분야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후 폴리아세틸렌 이외에도 폴리(1,4-페닐렌비닐렌·PPV), 폴리아닐린, 폴리티오펜, 폴리피롤, 폴리페닐렌 등의 수많은 전도성 고분자들이 개발되었으며 이러한 고분자들은 전도성 고분자로서뿐 아니라 무기 반도체들이 보이는 반도체 특성을 가지는 고분자로도 알려졌다.
즉 전계효과 트랜지스터(FET:Field Effect Transistors), 광다이오드(Photodiodes), 전기발광(Electroluminescence) 현상을 이용한 발광 소자(LED:Light Emitting Diodes), 태양전지(Solar cells) 등의 반도체 소자의 핵심 소재로서 이러한 전도성 고분자 소재가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중에서도 전기발광 소자를 이용한 디스플레이는 가장 상업화에 가까운 고분자 반도체의 응용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고분자를 이용하는 전기발광 디스플레이는 저분자를 이용한 전기 발광 디스플레이와 구별하기 위해 OLED라는 용어 대신 PLED(Polymer Light Emitting Diode) 또는 PELD(Polymer Electroluminescence Display)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유기EL(Electroluminescence)에 활용되는 고분자 소재는 저분자 소재와는 다른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분자 집합체의 총 무게인 분자량은 저분자 소재에 비해 고분자 소재가 통상 만배 이상 높다. 따라서 저분자 소재에 비하여 고분자 소재는 열적 안정성이 높으며 기계적 강도가 좋다. 박막 제조 공정면에서도 두 소재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저분자 소재는 진공 열증착(Thermal evaporation) 또는 기상 증착(Vapor phase deposition) 등 진공 장비를 이용한 건식공정을 거치는 반면 고분자 소재는 적절한 용매에 녹인 후 회전도포, 프린팅 등의 방법으로 박막을 형성하는 습식 공정을 거치게 된다. 따라서 고분자 소재는 저분자 소재의 진공 장비를 이용하면서 생기는 투자비 증가, 디스플레이 크기의 한계 등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기술로 사용될 수 있다.
또한 고분자 전기발광 소자를 제작했을 경우 구동전압이 저분자로 제작된 소자보다 낮기 때문에 디스플레이 응용에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고분자 소재는 발광 색상의 변화를 줄 수 있는 방법이 매우 다양하다. 여러가지 치환체를 사슬에 도입하는 방법, 사슬 내의 공액길이를 조절하는 방법, 사슬 내에 여러 모양의 고리를 도입하는 방법, 서로 다른 색을 내는 발광 재료를 블렌딩하는 방법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청색에서 적색, 백색까지 색상을 다양하게 낼 수 있다.
고분자 소재가 장점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분자 소재는 저분자 소재에 비해 순도를 높이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고분자를 합성하는 중합 과정에서 첨가되는 촉매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거나, 화학적으로 구조가 약간 변형된 유도체의 형성 등에 의한 불순물이 잔존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고분자 소재가 유기EL 소재로 지속적인 관심을 끄는 이유는 대화면 디스플레이로의 응용면에서 저분자 소재에 비해 높은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분자 발광 재료의 발전은 고분자 전기발광 소자의 상업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고분자 발광 재료를 이용하여 제작되는 고분자 전기발광 소자는 90년 영국의 케임브리지 그룹에서 PPV에 전기를 흘려주면 빛을 발한다는 것이 보고된 이후 많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으며 10여년의 짧은 연구 기간이었지만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왔다. PPV 이외에 PPV 유도체, 폴리플루오렌(PF) 등의 다양한 소재들이 개발되었으며 이러한 연구들을 토대로 응용성을 갖춘 재료들이 나타나고 있다.
초기에 고분자 전기발광 소자 개발에 큰 기여를 하였던 PPV는 용액 공정이 가능한 전중합체(precursor)를 이용하여 박막을 형성시킨 후 열처리에 의해 최종적으로 불용성의 공액이중결합을 갖는 고분자로 바꾸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고순도의 고분자 박막을 얻기 어려웠다. 따라서 초기의 PPV가 갖는 가공성, 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용해성을 좋게 함으로써 가공성이 우수한 공액이중결합을 갖는 PPV 유도체들이 개발되고 있다.
특히 유럽의 코비온오개닉세미컨덕터(Covion Organic Semiconductors)사에서는 중합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고분자 내의 결함을 조절, 그 동안 고분자 전기발광 소자에서 문제가 됐던 소자 수명의 향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PPV를 사용하여 얻을 수 있는 색깔은 녹색에서 오렌지-적색까지 가능하다. 즉 벤젠 고리에 알콕시기와 같은 전자주게 치환체가 있을 경우에는 오렌지색-적색을 얻을 수 있으며 전자주게 효과가 없는 페닐 혹은 실릴 치환체가 있을 경우에는 녹색을 보이게 된다. 또한 녹색 발광 단량체와 오렌지-적색 발광 단량체와의 공중합을 통하여 녹색과 오렌지-적색 사이의 색깔까지도 나타낼 수 있다.
PPV를 이용해서는 녹색 혹은 적색의 구현은 가능하지만 그 보다 높은 밴드갭(band gap)을 가져야 하는 청색의 구현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높은 밴드갭을 갖는 새로운 형태의 고분자가 필요하게 됐으며 그것의 하나가 폴리(p-페닐렌·PPP)이고 특히 최근에 각광 받기 시작한 것이 PF다. 비닐기가 없이 페닐링만이 연속적으로 연결된 이러한 고분자는 PPV에 비하여 높은 밴드갭을 가지고 있으므로 청색 발광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산화안정성도 매우 우수하다. 또 PF의 기본 단량체인 플루오렌은 다양한 치환체를 도입할 수 있으므로 소재 개발에 있어서 많은 자유도를 제공하기도 한다. PF는 일본 요시노 교수 팀에 의해서 처음 발표됐다.
초기의 합성법은 높은 분자량을 얻기 어려웠으며 소자의 특성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PF이 전기발광 소자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96년 이후 미국의 UNIAX·다우·IBM연구소에서 새로운 중합 방법을 통하여 높은 분자량의 고분자들을 얻기 시작한 이후이다.
PF는 일반적으로 높은 열안정성을 가지고 있으며 액정성을 가지고 있어 이를 이용하여 편광된 빛을 발광하는 전기발광 소자를 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PF는 여기된 상태에서 서로 다른 사슬간의 상호작용으로 장파장쪽에 새로운 발광이 생성되어 색순도를 떨어뜨리는 문제점이 있어 이를 제한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주로 공중합법을 이용하여 고분자 사슬간의 상호작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들이 고안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디스플레이에서 원하는 조건을 만족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청색 발광의 PF는 PPV와는 달리 높은 에너지의 빛을 발광하므로 쉽게 낮은 에너지의 녹색 혹은 적색의 빛을 얻을 수 있다.
즉 플루오렌 단량체보다 낮은 밴드갭을 갖는 단량체와 공중합을 함으로써 발광 빛을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다우사에서는 녹색, 황색을 얻을 수 있었다. IBM사에서는 소량의 낮은 밴드갭 단량체를 공중합시키므로써 발광 빛의 색깔을 변환할 뿐만 아니라 높은 효율의 소자를 제작할 수 있다. 초기의 고분자 전기발광 소자는 최적화되지 않은 구조로서 알루미늄을 음극으로 사용하여 0.01%의 양자효율 정도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나 소자의 양극으로써 낮은 일함수를 갖는 칼슘, 바륨과 같은 전극을 사용함으로써 높은 소자 효율의 향상을 얻었다. 또한 양극인 ITO에서는 산소에 의한 플라즈마 처리와 전도성 고분자인 폴리스티렌술폰산(poly-styrene sulphonic acid)으로 도핑된 PEDT을 ITO와 발광 고분자층 사이에 도입함으로써 외부 양자효율이 수 %인 한 단계 더 발전된 소자를 얻었다.
고분자 전기발광 소자의 성능은 저분자 소자와도 거의 대등한 정도의 수준을 보여 주고 있으며 청색·녹색·적색의 소재의 100cd/㎡의 휘도에서 각각 3, 22, 2 lm/W의 발광효율을 보이고 있다. 다만 소자의 수명면에서는 저분자 소자에 비하여 떨어지는 편이며 특히 청색의 경우는 많은 개선이 필요한 실정이다.
현재 다우, CDT, 코비온 등 여러 기업에서 보다 향상된 고분자 소재, 특히 청색 발광 소재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도 대학과 연구소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소재 개발이 진행되고 있으며 일부 기업에서도 그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이미 참여하고 있거나 참여를 검토 중이다.
이러한 고분자 전기발광 소자를 이용한 디스플레이의 초기 응용은 백라이트 혹은 세그멘티드 디스플레이들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며 이미 필립스사에서는 이러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시설을 준비하고 있다.
또 다른 응용으로는 수동 구동 디스플레이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수동형으로 디스플레이를 만들 경우 대화면일수록 높은 전류가 필요하여 디스플레이 크기에 제한이 있다.
따라서 수동 구동 디스플레이는 저분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휴대폰의 소형 디스플레이 등의 응용이 가능할 것이며 이미 고분자를 이용한 휴대폰용 단색 수동 구동 디스플레이가 시제품 수준으로 개발되고 있다.
고분자 전기발광 디스플레이는 저분자 전기발광 디스플레이에 비해서 대화면 디스플레이의 제조에서 높은 경쟁력을 보일 것이다. 즉 진공공정을 이용해야 하는 저분자 기술에 대하여 용액 공정을 이용하는 고분자 기술이 비용뿐 아니라 공정 측면에서 높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풀컬러 능동구동 대화면 디스플레이 부분에서 높은 기술 우위를 점할 것으로 예상된다. 풀컬러 디스플레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녹색·적색·청색을 발광하는 고분자 소재를 개발하는 것 이외에도 고분자의 패터닝 방법의 개발이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되어 지고 있다. CDT와 세이코-엡슨에 의해서 제안된 잉크젯 프린팅법은 다년간의 연구로 그 수준이 점차 높아져 풀컬러 패터닝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고분자 디스플레이 개발에 참여하는 필립스, 삼성SDI, 도시바 등도 적극적으로 잉크젯 프린팅 법을 채용하려는 연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잉크젯 프린팅법 이외에도 새로운 패터닝 기법을 개발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삼성SDI, LG필립스LCD, 일본 DNP 등은 기존의 일반 고분자 박막 프린팅 또는 패터닝 기법을 전기 발광 고분자 패터닝에 적용하여 잉크젯 프린팅법 이외의 새로운 패터닝법을 개발하고 있는 중이며 가시적인 결과들이 곧 나타나리라고 예상된다. 이와 같이 기존의 디스플레이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고분자 디스플레이 개발에 참여하면서 고분자 패터닝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한편 유기EL 디스플레이를 이용한 플라스틱 디스플레이 개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경량 및 박막, 그리고 내충격성이 우수한 플라스틱 디스플레이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유기EL 디스플레이는 적절한 기술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미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 파이어니어사는 저분자 유기EL을 이용한 플라스틱 디스플레이를 발표하였으며 국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고분자 유기EL을 이용한 플라스틱 디스플레이를 보고한 바가 있다. 이것은 접거나 말을 수 있는 종이 같은 디스플레이가 2015년께에는 상업화되리라는 예측을 하고 있는 가운데 실용화를 위해 전자 잉크를 사용하는 전자 종이 기술과 함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온 고분자 디스플레이는 양적인 면에서 저분자 디스플레이보다 많이 연구되지 못하였지만, 최근 고분자 소자의 성능과 수명이 향상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초기에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주로 연구되었으나 근래에 대기업의 관심 기술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직도 고분자 전기발광 디스플레이 기술이 현실화되기까지는 많은 장벽이 남아 있지만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이루어온 발전을 생각하면 무난히 남은 문제점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