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 정보기술(IT)업체 A사 관계자는 최근 금융권을 찾았다가 겪은 황당한 경험을 털어놨다.
지난 99년 창업이후 1년여만에 제품을 개발, 해외시장에 진출해 잇따라 계약을 체결하는 등 나름대로 자신감을 얻은 그는 자금이 필요해 모은행에 대출을 신청했다. 물론 우수벤처기업 확인서와 신용보증서 등 필요한 서류도 함께 제출했다. 하지만 그는 중소기업, 그것도 지방소재의 업체에는 은행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새삼 깨닫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우수기업 확인서나 신용보증서는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했습니다. 올해가 매출원년인데도 ‘왜 지난해 매출이 없느냐’ ‘본사가 지방에 있느냐’ 등을 반복해 묻더니 결국 담보없이는 대출이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그는 “금융권들이 지역 IT벤처 업체들의 기술력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거들떠 볼 생각도 안하는 것 같다”며 “이 때문에 대형업체와 중소업체, 중앙과 지방 소재 업체간의 편중현상이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가 IT 등 5개 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금융권들도 중소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다는 발표가 줄을 잇지만 일선 현장에서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지방소재 벤처기업들은 계속되는 경기침체로 자금난이 심각해 당장 고사위기에 처한 경우가 부지기수지만 구세주를 만났다는 소식은 감감하기만 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군분투했던 유망 지역업체들이 아예 사무실 전체를 중앙으로 옮기거나 불필요한 서울사무소를 따로 만드는 등 ‘탈(脫) 지방화’를 꾀하는 현상이 다시 생겨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역 벤처기업 상당수가 문을 닫거나 중앙 대형업체와 계약을 맺는 ‘하청업체’로 전락하면서 모처럼 일고 있는 IT 창업 붐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업계 관계자들은 IT산업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중앙과 지역업체를 획일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금융기관의 잣대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적어도 올 연말까지 한시적이나마 지역업체 회생을 위한 특별대책이라도 마련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소연하고 있다.
사실 그동안 수많은 벤처기업 육성책이 마련돼 시행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이렇다 할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장에서 직접 뛰는 기업가들이 체감할 수 없다면 이는 탁상행정이자 예산낭비에 다름 아니다. 말로만 차세대 첨단산업 강국을 표방할 게 아니라 유망한 지역 벤처기업이 성장해 산업의 토대를 이룰 수 있도록 하루빨리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 시행하기를 기대해 본다.
<광주=김한식기자 hs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