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픽스 조신희 사장
85년 연세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85∼87년 금성반도체 연구소 컴퓨터개발실
87∼89년 금성소프트웨어 연구소 OA개발실
89년∼현재 3D 애니메이션 제작사 시네픽스 대표이사
1. 하드웨어의 급속한 발전과 제작기법의 변화
필자가 처음 사업을 시작한 90년의 가장 강력한 PC의 사양은 다음과 같다.
△CPU:인텔 i386프로세서(클록주파수 33㎒)
△램:640 + 8MB(EMS메모리)
△하드디스크:340MB
△오퍼레이팅시스템:MS DOS 3.1
△그래픽보드:AT&T Targa시리즈(PC에서 처음으로 1600만색 표시가능)
△모니터:14인치 Electrohome
지금의 보급형 PC와 비교도 되지 않는 이 사양이 당시에는 1000만원 이상을 호가했다. 물론 3차원(3D) 애니메이션 제작을 가능하게 해주는 TOPAS소프트웨어를 포함하지 않은 가격이다. 최상위 버전인 TOPAS 애니메이터는 당시 거의 2000만원이 넘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PC에서도 3D애니메이션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90년대 초기 고난이도 그래픽은 주로 유닉스를 운용체계(OS)로 사용하는 ‘실리콘그래픽스(Silicon Graphics)’ 워크스테이션에서 작업이 되었다. 알리아스(Alias), 소프트이미지(Softimage), 웨이브프론트(Wavefront), TDI/익스플로러 등 주요 소프트웨어는 모두 실리콘그래픽스 워크스테이션에서만 실행됐다. 이 워크스테이션의 구입 가격은 2000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대에 달했다. 결국 당시로선 이런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층은 매우 제한됐다. 이런 상황에서 100% 3D기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은 전혀 경제성이 없는 일로 보였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미 마이크로소프트사 주도로 대표적인 3D 소프트웨어인 소프트이미지(현재는 Avid사가 인수)가 윈도NT에 이식되면서 그동안 고가 워크스테이션의 중심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저가격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다. 이어 인텔사에서 윈도NT에 적합한 펜티엄 프로 CPU를 발표했다. 이때부터 실리콘그래픽스 워크스테이션과 윈도NT 워크스테이션과의 경쟁이 시작된다.
97년 이후 알리아스를 토대로 한 마야(Maya)가 윈도NT에서 구동되기 시작하면서 그래픽 분야에서 윈도NT시대가 도래한다. NT 워크스테이션은 기존의 PC와 부품을 공유, 저가격의 워크스테이션 보급에 커다란 기여를 한다. 그러면서 점점 100% 3D로 TV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이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최근 윈도 워크스테이션의 사양은 다음과 같다.
△CPU:듀얼 펜티엄4 Xeon(클록주파수: 1.7㎓)
△램:1Gb(PC800규격 램버스 메모리)
△하드디스크:36Gb(U160 SCSI규격)
△그래픽보드:Intergraph의 Wildcat 5110
△오퍼레이팅 시스템:윈도2000 프로페셔널
△모니터:21인치 Trinitron Flat
10년만에 같은 1000만원대 금액을 주고 구입할 수 있는 컴퓨터의 사양이 이렇게 발전했다. 인텔에서는 2010년에는 30㎓의 처리속도를 갖는 CPU를 출시한다고 발표하는 등 3D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
CG분야 고품질 렌더링을 위해 80년대 ‘CRAY수퍼컴퓨터’, 90년대 ‘워크스테이션급 컴퓨터’가 쓰였으나 이제는 일반 PC에서 가능하게 됐다. 대규모 자금 투입없이 높은 수준의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향후 제작기법이 셀애니메이션 기법의 2차원에서 3차원 컴퓨터그래픽 기법을 이용한 애니메이션으로 전환하는 것은 대세이며 특히 TV에 방영되는 시리즈물의 경우 3D기법은 한번 모델링한 라이브러리를 재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광 받고 있다.특히 국내의 경우 셀애니메이션 OEM 제작 시장이 개발도상국과의 제작비 경쟁에서 밀리고 있어 전략적 차원에서 3D시장을 키울 필요성이 있다. 3D 시장은 아직까지 초기시장인 만큼 경쟁자가 많지 않고 개발도상국에서 이런 제작기술을 보유하려면 3∼4년이 지나야 가능하다. 따라서 3D는 독자 기획이건 3D OEM 제작이건 국내 업체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2. 국내 제작사의 현실
최근 애니메이션 영화의 붐이 일면서 여러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해외업체와의 협력이나 공동제작 등 과거의 하청생산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작품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시장에 빨리 진입하겠다는 급한 마음에 득보다는 실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경영진이 애니메이션 비즈니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해 진다.
TV애니메이션을 기준으로 볼 때 3차원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하든, 기존의 셀애니메이션 기법을 이용하든 애니메이션을 기획하여 데모를 제작하고 시리즈 제작이 결정되는 단계까지 가는 데 2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된다. 본 제작에 들어가면 방송이 완료될 때까지 2년 이상의 제작기간이 걸린다. 즉 애니메이션 제작은 4∼5년의 기간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여러 요인 때문에 기간을 단축하면 질적인 저하는 피할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국산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요인으로 대부분 실패하였거나, 또는 어느 정도의 국내에서는 성공하여도 작품의 완성도 문제로 해외 시장 진출은 거의 불가능했다. 특히 다른 작품을 모방했거나 완성도가 낮은 작품으로 미국 및 유럽 시장 등지에 수출하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설립할 때 대부분 자체 기획의 높은 완성도의 작품을 제작하기로 목표를 설정한다. 그러나 기획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면서 위험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상당수의 업체가 독자적인 기획을 포기하고 외국에서 기획된 작업을 들여와서 기존의 하청업체처럼 메인 프로덕션 작업만을 국내에서 진행한다.
예를 들어 자본 참여를 통한 공동제작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가장 중요시되는 한국 인력의 기획 참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는 한국은 다시 생산을 하기 위한 하청기지로 활용될 뿐이다. 외국에서 넘어온 콘티를 바탕으로 제작만 하고 납품후 외국의 업체로부터의 수정(Re-take)을 기다리는 상황은 하청시절의 애니메이션 제작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자본 참여로 흥행에 성공하는 경우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한국이 3D 애니메이션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기획능력이 필요하며, 이것이 단순한 경제적인 논리 때문에 외면되서는 안된다.
이러한 사례를 접할 때마다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이 오히려 하청시절보다 더 나빠졌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청작업인 경우 제작비의 100%를 해외로부터 받을 수 있었으나, 합작 형태를 취하는 경우는 국내에서도 제작비의 일부를 부담해야 한다. 만약 외국에서 추가수익이 창출되는 경우는 문제 없지만 추가수익이 발생하지 않은 경우 제작사의 채산성을 악화시킬 것이 뻔하다. 회사의 채산성이 나빠지면 애니메이터에 대한 대우도 점차로 나빠지게 된다. 생계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래에 대한 비전까지 없으면 평생직장으로 애니메이터 일을 하기는 어렵게 된다. 이는 결국 고급 인력 유출 및 애니메이션 작품 질 하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장기적으로 한국이 해외 시장에서 좋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작품을 본뜨지 않고 100% 독자 기획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기업체 입장에서는 단순 하청이나 해외에서 기획안을 가져오는 것이 어쩔수 없는 선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산업이 엄청난 규모인 것은 단순히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방영을 하는 것으로 수익을 창출하기 때문이 아니다. 애니메이션으로 발생하는 부대사업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까지 인기 절정이었던 ‘포켓몬’을 보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상승하면 장난감과 비디오, 게임 및 캐릭터 산업의 매출로 이어져 방영수입에 비해 100∼1000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하청으로 100편 이상을 제작하여 얻는 수익에 비해 1편의 애니메이션이 성공적으로 방영되면서 올리는 캐릭터 산업의 부가 수익이 훨씬 크다는 점이다.
이제 3D 창작 애니메이션은 어엿한 벤처산업이다. 위험부담은 크지만, 성공했을 때 엄청난 수익 창출을 보장한다. 사업적으로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서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이 사업계획서를 이용해 벤처창업자금이나 창업투자회사를 만나거나 정부에서 지원되는 자금을 지원받으면 기획 및 데모 제작에 필요한 3억∼5억원 정도의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게 됐다. 이러한 자금으로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세계시장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기획안을 완성하면, 프로덕션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많다. 충분히 검증된 완성도가 높은 기획안이 있다면 성공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세계적 수준의 작품 완성도, 애니메이터에 대한 정당한 경제적 대우, 밤새우지 않고 근무 시간에 맞는 제작스케줄, 평생 몸 담을 수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만들려면 창작 이외에 방법은 없다. 미국 ‘월트디즈니’나 일본의 ‘지부리’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쌓은 것이 아니다. 수십년에 걸친 그 회사의 모든 구성원의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열의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