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존재가 다 그러하듯 전자무역도 현실 제도나 환경을 앞질러가고 있다. WTO나 OECD 같은 국제기구들이 전자무역에 대한 논의를 벌이고 있는 것도 현 체제보다 앞서가고 있는 전자무역을 어떻게 제도권에 수용하느냐에 대한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자무역으로 인해 가장 큰 변화를 맞게 되는 것은 다자간 협상에 근간을 두고 있는 WTO체제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오는 11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뉴라운드 각료회의의 목적은 아직도 미진한 서비스시장 개방과 이에 필요한 시장접근성이 주 의제가 될 예정이다. 그러나 전자무역은 우루과이라운드보다 한결 진전된 뉴라운드 체제를 구축하려는 WTO보다 앞서 서비스시장 개방과 용이한 시장접근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디지털 영상물의 경우 온라인 전송이나 다운로드를 통해 세계 어느 곳이든 마음대로 주고받을 수 있으며 그것도 무관세가 적용되고 있다. 우편이나 물류사업도 국경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DHL이나 페덱스 같은 국제특송업체들은 인터넷을 통해 세계 어디서든 우편물이나 물품의 배달을 주문받을 수 있다.
특히 세계 굴지의 업체들이 모여 만들고 있는 글로벌 e마켓의 잠재적 힘은 WTO의 시장개방 노력을 무색케 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이들은 초국적 기업의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국경없는 조달체계와 판매체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이들에 국경과 국가마다 다른 제도나 환경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 합심해 국적을 초월한 활동을 전개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형상체제의 변화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또 WTO가 다자간 협상과 강력한 제재기능으로 현 국제질서를 주도하고 있지만 전자무역은 매우 활발한 양자간 협상체제에 바탕을 둔 또다른 질서를 창출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역시 대형 글로벌 e마켓의 속성에서 기인한다.
업종별 또는 특정품목별로 다양한 글로벌 e마켓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국가의 업체들이 여기에 참가하는 만큼 원활한 e마켓 운영을 위해서는 특정 업종이나 품목에 대한 개방과 제도개선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럴 경우에는 국가 전반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자간이 아닌 해당 국가들간 양자간 협상이 중요한 축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리적 공간에 바탕을 두고 있는 지역경제협력체가 아닌 전자무역을 축으로하는 사이버경제협력체의 등장도 예견되고 있다. 글로벌 e마켓은 사이버경제협력체의 작은 단위가 될 공산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정 글로벌 e마켓을 통해 특정 산업이나 품목의 교역확대를 필요로 하는 국가들끼리 양자간 협상을 통해 시장을 개방하고 서로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협력체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보다 큰 단위로는 전자무역이 발달된 국가간의 협력체 등장도 가능할 전망이다. 전자무역은 전자무역체제가 발달된 국가간의 교역량을 증가시키고 이들간에 전자무역체제에 맞는 제도와 환경개선을 위해 새로운 경제협력체를 형성케 된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기존의 지역경제협력체의 기능과 역할은 역내 국가들의 전자무역 발전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역내 대부분 국가들의 전자무역이 고르게 발전될 경우 지역경제협력체는 유력한 사이버경제협력체로 부상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 기능이 퇴색될 가능성도 높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지역경제협력체들은 역내 국가들의 전자무역 활성화와 함께 정보격차 줄이기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범 동아시아 전자무역망을 구축하려는 것은 이같은 관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앞으로 국제질서는 정보의 유무와 전자무역 발전정도에 따라 재편될 것입니다. 정보화와 전자무역이 발달된 국가간의 협력이 증진되고 그렇지 못한 국가들은 대열에서 탈락할 것입니다.” 심상렬 광운대 통상학과 교수는 앞으로 전자무역이 기존의 물리적 체제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렇다고 기존 물리적 체제가 와해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존 체제는 전자무역의 발전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이를 제도적으로 수용해 나가면서 존속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존 체제나 질서가 전자무역 환경에 얼마나 적응해 나가고 수용하느냐에 따라 성장과 도태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걸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존 WTO체제와 새로운 전자무역체제는 상당기간 공존하며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킬 전망이다. 두 체제가 언제까지 공존하게 될지, 한쪽을 흡수해 하나로 통합될지, 아니면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낼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일각에서는 전자무역의 대두로 국제교역질서를 WTO의 상품과 서비스 교역체제가 아닌 새로운 디지털교역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나
국제무역질서를 형성하는 중요한 3가지 축은 제도와 환경적인 측면인 국제규범과 무역절차, 그리고 그 주체가 되는 국가 또는 기업이다.
지금까지는 국가가 주체가 돼 다자간 협상을 통해 규범과 절차를 만들어왔다. 기업이 국가를 움직이는 데는 일정 정도 작용했지만 주체로 활동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양자간 협상을 통해 교역확대를 꾀하는 국가들도 있지만 다자간 규범에 비해 그 영향력은 매우 미미하다.
그러나 전자무역 시대에는 규범과 절차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국가가 아닌 기업으로, 협상방식도 다자간보다는 양자간 협상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자무역 절차나 이에 필요한 서류양식, 통신 프로토콜, 언어, 비즈니스 모델 등을 만들고 이를 제도화시키는 데는 국가의 역할이 한계가 따른다. 이미 이 분야는 업계가 주도를 하고 있으며 국가표준보다 시장표준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국가는 업계가 만들어내는 규범이나 제도를 수용하는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역할에 머물 전망이다.
국가보다는 기업들이 사실상 주도하는 양자간 협상이 국가들간 다자간 협상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자무역의 개방성과 글로벌성, 그리고 신속성으로 인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다자간 협상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업종별이나 특정 품목별 전자무역 관계에 있는 거래기업들이 각자 자국을 종용해 양자간 협상을 통해 문제를 신속히 풀어나가는 추세가 일반화될 것을 예고한다.
양자간 협상의 활성화와 함께 지역경제협력체와 사이버경제협력체간에 종적·횡적 연대나 협력도 예상됨에 따라 국제무역질서가 지금보다 복잡다단해질 전망이다.
<유성호기자 shy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