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싣는 순서
1. 남북IT교류, 이제부터 시작이다
2. ‘한글’과 ‘조선글’의 차이
3. IT교류협력의 국제장벽, 바세나르 협약
4. 남한의 ‘대북IT전략 바로보기’
5. 북한의 ‘대남IT전략 바로보기’
남북간 IT교류가 합작사를 설립할 만큼 급진전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교류의 근간을 위협하는 기술적 문제들이 하나씩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 가운데 ‘한글’과 ‘조선글’의 정보처리 환경의 간극을 더욱 벌리고 있는 ‘윈도의 조선글화’ 문제는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윈도의 조선글화 문제가 남한에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 2월 본지 특별기획취재팀이 취재차 평양을 방문했을 때다. 이 때 북한측은 취재팀에 윈도 운용체계를 ‘조선글’화하고 싶다며 미국 MS로부터 기술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남한의 각계각층이 협조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북한이 윈도를 조선글화(로컬라이제이션)하려면 필수적으로 저작권자인 MS가 해당국가의 아이디(Locale ID)를 부여해줘야 한다. 현재 미국 정부는 윈도 운용체계가 이른바 ‘바세나르협약’에서 규정하고 있는 ‘전략물자’의 범주에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MS의 대북한 기술지원에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다소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MS 역시 운용체계가 로컬화되려면 일정규모의 IT내수시장이 형성돼야 하는데 현재 북한의 컴퓨터 보급대수(펜티엄급 이상 3만대쯤)로는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북한측의 요구를 거절하고 있다.
북한이 취재팀에 요청한 것은 바로 MS로 하여금 국가 아이디를 부여할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북한이 표현한 대로 단순히 ‘민족적’ 차원에서 남한이 도와준다고 해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정보처리 방식에서 ‘한글’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조선글’ 윈도가 개발돼 나올 경우 ‘한글’과 ’조선글’ 사이의 괴리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의 펜티엄PC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영문 윈도95/98이다. 북한은 이 영문버전에서 조선글을 입출력할 수 있도록 자체개발한 다국어 입력프로그램인 ‘단군4.8E’를 얹어쓰고 있다. 90년대 초반 남한에서 윈도3.1 영문버전에 한글 입출력 프로그램을 얹어쓰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던 기술적인 문제는 북한이 IT전략을 기존의 자급자족 형태에서 강성대국의 전초 산업으로 확대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윈도95/98까지는 국가 ID가 없이도 외국 애플리케이션들과의 호환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MS가 지난해 기술적으로 전혀 다른 ‘윈도2000 프로페셔널’을 발표하면서부터는 당장 입출력 장애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중국 단둥의 ’하나프로그람센터’에 파견돼 있는 북한 엔지니어들은 “윈도95/98까지는 ‘단군4.8E’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을 해왔지만 윈도2000/XP 등 기능이 크게 바뀌는 새 버전이 나오면서부터는 많은 개발 작업이 필요해지고 있다”며 “특히 국가 ID가 없어 프로그램과 체계 연구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하나프로그람센터에서 북한 엔지니어들의 IT교육을 담당했던 남한의 한 강사는 “북한 운용체계 분야 관계자들은 MS가 글자 표현이 복잡한 티벳에 대해서도 국가 ID를 배정해 주면서 왜 자신들에게는 거부하느냐며 어려움을 토로했다”고 전했다.
윈도의 국가 ID 배정문제는 복잡한 미 행정부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공식표면화된 지 6개월여가 지난 현재까지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MS는 자체 수출 제한규정에 ‘미국 정부가 수출을 금지하거나 거래를 규제하는 모든 국가들을 비롯해 제품 또는 그 일부분을 핵무기나 생화학무기의 설계·개발·제조에 활용할 것임을 알거나 알 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되는 개인 또는 단체’에 수출이나 재수출하지 않을 것임을 명시해 놓고 있다. 여기에 비춰볼 때 국가 ID 배정 같은 기술적 지원도 수출 제한 규정에 포함된다는 판단이다. 이 문제는 취재팀의 메시시가 전달된 이후 큰 관심을 보였던 남한의 IT업계에서도 소강국면에 처해 있다.
그러나 윈도의 ‘조선글화’는 IT교류협력의 확대발전을 원하는 남한의 입장에서는 결코 가볍게 넘길 만한 사안이 아니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조선글화’가 실현돼도 문제고 실현이 안돼도 문제가 된다.
남한의 각계각층이 나서 미국 정부와 MS를 설득할 수도 있지만 조선글 윈도가 등장하게 되면 이는 문법체계와 서로 다른 코드페이지를 지니고 있는 ‘한글’
과 ‘조선글’의 고착화가 가속화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해결방안은 못된다.
그렇다고 북한의 요청을 마냥 모른 채 할 수만은 없다. 교류협력 확대를 위해서는 북한의 기술수준과 개발환경을 향상시켜줄 ‘의무’가 남한에 있기 때문이다.
남한 IT전문가들은 “북한이 급변하는 정보화 물결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남한의 한글 윈도를 받아들이는 편이 이익이고 해결방안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북한측은 이같은 주장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완고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북측 IT사정에 밝은 국내 한 전문가는 “이 사안은 북한 내부의 IT에 대한 요구가 그만큼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며 “그동안 추진해온 남북 IT교류협력 사업의 지속적인 확대를 위해 이제부터라도 진지하게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남북 IT 표준과 지속적인 IT교류 확대 등의 대명제를 앞에 두고 이 사안에 대해 앞으로 학계와 IT관련 기관, 그리고 정부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다.
<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
◆북한의 국가 ID 배정을 위한 대남 요청 메시지 요지
* 이 메시지는 북한의 평양정보쎈터 관계자가 지난 2월 본지 취재팀에 직접 전달한 것이다.
1. MS 윈도2000 프로페셔널에 다국어 정보(한국, 중국, 대만, 싱가포르…)가 있지만 ‘조선’ 항목이 없다.
2. MS가 국가 아이디를 배당하면 좋겠다.
3. 이 문제는 미국 행정부에서도 제도적으로 제한을 하지 않겠다고 확인하였고, (지난해) 조미(朝美)회담에서 승인되었으므로 MS 결심에 달려있다.
4. MS는 필요에 따라 미국 정부에 (의견을) 물어 볼 수 있는 입장이다.
5. 미국 정부가 불허 또는 승인을 하면 그 결과를 북측(평양정보쎈터)에 알려달라.
6. 평양정보쎈터는 IME, 폰트, NLS를 제공할 수 있다.
7. MS가 노력하면 조선의 수많은 윈도 사용자로부터 상업적 거래관계가 있을 것이다.
8. 한겨레로서 (한국의 MS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9. MS가 용의가 있다면 우리는 MS 윈도를 수용하여 우리식 대로 써나가고 보급해 가겠다.
10. 이런 요청은 남측의 이해관계에도 전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인터뷰
박찬모 통일IT포럼회장(포항공대 대학원장)
박찬모 포항공대 대학원장(67)은 지난 10여년 동안 북한의 IT분야를 연구해온 대북 IT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모두 다섯 차례 방북해 북한 IT현황을 살펴 본 경험이 있는 박 원장은 최근 포항공대와 평양정보쎈터의 IT·과학기술 분야 공동연구 합의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북한이 윈도 국가 ID 배정을 요청한 배경은.
▲북한은 윈도98까지는 조선글 입출력 프로그램인 ‘단군’을 이용함으로써 조선글 입출력이 가능했으나 새 버전 윈도2000부터는 이것이 안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윈도 국가 ID 배정이 안돼 그렇다는 설명이었다. 지난 3월 평양정보쎈터를 방문했을때 북한이 국가 ID가 없어서 힘들어하는 것을 보았다. 북한은 지난해부터 미국 정부와 MS에 이 문제 해결을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은.
▲앞으로 남북이 공통 코드를 쓰면 좋겠으나 이게 당분간은 힘들 것 같다. 따라서 코드가 통일되기 전까지 당분간 북측이 자체 코드 시스템을 쓰면서 정보기술을 발전시키려 할 경우 국가 ID 배정에 도움이 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고려해 봄직하다. 중국·대만·싱가포르 등 한자권 국가들이 각자 별도의 국가 코드를 갖고 있는 것도 참고가 될 것이다.
-북한의 요청에 대한 남한의 역할은.
▲한국 정부나 MS 한국지사에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돕는 게 좋겠다. 이것이 남북한의 코드 통일을 저해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국가 ID를 배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코드 통일이 더 빨리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
<인터뷰2>
김유종 평양정보쎈터 기사장
김유종 평양정보쎈터 기사장은 북한의 IT전문 교육기관인 ‘O&P 프로그람 강습소’ 소장을 맡고 있고 일본·미국·인도·중국·싱가포르 등을 수차례 방문해 세계 IT흐름을 꿰뚫고 있는 북한내 대표적인 IT전문가다. 이 인터뷰는 지난 7월 평양에서 만난 나눈 대화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MS에 국가 ID 배정을 직접 요청했는가.
▲했다. 그동안 국가 ID가 배정이 안돼서 프로그램 개발과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MS는 윈도 운영체계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인정해야 한다.
- MS와의 협상 진행 상황은.
▲지난 3월 미국 시애틀에서 MS 관계자와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한 뒤 나중에 MS가 요구한 관련 자료를 보냈다. 현재 MS쪽에서 답변 결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MS가 ID 배정에 난색을 표명했다는데.
▲사실과 다르다. MS에서 아직 그같은 입장 표명이나 답변은 없었다.
-조선글 윈도를 직접 개발하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조선글 윈도를 개발하겠다는 게 아니다. 국가 ID만 배정해주면 된다. 또 MS측에 기술지원센터 설립을 요청한 적도 없고 이를 세울 필요도 없다.
-남한의 한글 윈도를 북한이 수용하는 방안은.
▲조선이 한글 윈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지금까지 오랫동안 주체적으로 개발, 사용해 오던 좋은 프로그램을 버릴 수 없다.
<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