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초, 세계적 투자기관인 베어스턴의 애널리스트 네프는 “게이트웨이, 애플, 휴렛패커드(HP), 컴팩컴퓨터 등 세계적 컴퓨터업체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어 이들간에 인수합병(M&A)이 불가피하다고 밝혀 세계 IT업계를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당시 해당 업체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펄쩍 뛰었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7개월 후, 마침내 세계 컴퓨터시장의 대변혁을 예고하는 빅뱅이 이루어졌다. HP가 컴팩을 인수해 합병하면 연매출, 세계 PC시장 점유율, 세계 서버시장 점유율 등에서 단연 세계 제일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컴팩을 합병키로 한 HP는 성명을 발표, 합병사는 서버·PC 및 핸드헬드(PDA)·이미지&프린팅 등에서 세계 제일의 규모를 자랑한다고 밝혔다. 또 HP는 성명서에서 합병사의 연매출규모는 874억달러에 달하며 세계 160개국에 14만5000명의 직원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이와함께 앞으로 합병사는 4개의 사업부로 운영된다고 덧붙였다. 즉 △이미징&프린팅 사업부(연매출규모 200억달러, 수장에 현 HP 브요메시 조시 사장) △액세스 디바이스(290억달러, 현 HP 듀아네 지츠너 사장) △IT인프라 스트럭처(230억달러, 현 컴팩 부사장 피터 블랙모어 △서비스 사업부(150억달러, 현 HP 앤 리버모어 사장) 등이다.
◇합병규모 및 배경=우선 HP와 컴팩컴퓨터의 합병규모는 포천500이 작년을 기준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911억6500만달러에 달한다(HP 487억8200만달러, 컴팩 423억8300만달러). 이는 같은 기간의 IBM(883억9600만달러)과 비교해 볼 때 28억달러 정도 많은 것이다.
세계 PC시장에서도 합병사는 20%(올 2분기 기준 HP 6.8%, 컴팩 11.2%)에 달하는 점유율을 차지, 현재 이 시장 1위인 델컴퓨터(13.1%)를 제치고 세계 최고로 올라서게 된다. 세계 PC시장 점유율이 7%에 불과한 IBM보다 무려 3배나 많다. 또 기업 컴퓨터를 운영하는 서버시장에서도 합병사는 37%의 점유율을 보이며 이 시장 2위인 델컴퓨터보다 2배나 많게 된다. 그동안 양사는 서버시장에서 델컴퓨터의 선전으로 고전해왔는데 실제 지난 6월 30일 끝난 미국시장에서의 서버 판매량 실적에서 컴팩과 HP는 작년 동기보다 각각 26%, 25%나 하락하는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반면 델컴퓨터와 IBM은 오히려 판매량이 늘어나는 호조를 보였다. 이에 따라 새로운 합병사는 이러한 부진을 일거에 만회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HP의 컴팩 인수합병은 복합적인 요인을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요즈음 세계 IT업체의 화두인 서비스분야 입지강화는 인수합병의 가장 큰 이유로 지목되고 있다.
서비스분야는 IT업체에 마지막 남은 캐시플로(효자사업)로 여겨지고 있어 그만큼 HP, 컴팩, IBM 등 세계적 IT업체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을 벌여왔다. 현재 IT서비스 시장에서는 IBM이 글로벌 서비스 조직을 앞세우며 단연 앞서가고 있다. IBM은 올들어서도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따내며 컴팩과 HP를 따돌리고 있다. 그동안 HP와 컴팩은 세계 최대 IT서비스업체인 IBM을 따라잡고자 치열한 노력을 벌여 왔으나 역부족이었다. 피오리나 HP 최고경영자는 작년에 IT서비스사업을 강화하고자 세계적 컨설팅업체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를 무려 80억달러 이상을 주면서 인수하려 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컴팩도 IT서비스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지난 5월 프록시콤 등 전문업체를 인수하려 했으나 물거품으로 끝난 적이 있다.
이처럼 IT서비스 분야에 있어 IBM을 추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여온 두 회사가 합쳐지면 앞으로 세계 IT서비스 시장에는 그야말로 총성없는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경쟁자들을 압박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는 것도 인수합병의 또다른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미국의 신경제 추앙으로 황태자 대접을 받던 미국 IT산업은 갑자기 들이닥친 경제침체가 미국은 물론 유럽, 아시아 등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홍역을 치르고 있다.
특히 그동안 닷컴업체가 서버를 대량으로 구입함으로써 고성장을 누려 왔던 컴퓨터 하드웨어업체들이 더 타격을 받고 있는데 지난 2분기 세계 PC 판매량은 15년 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델컴퓨터, 게이트웨이, HP, 컴팩컴퓨터, IBM 등 세계적 컴퓨터업체들은 그동안 앞다퉈 가격을 내리면서 치열한 저가경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제살깎기식의 저가경쟁에서는 맞춤PC와 온라인 판매를 도입해 PC 원가를 낮춘 델컴퓨터를 당해낼 컴퓨터업체가 없었다. 결국 1위였던 컴팩컴퓨터마저 델과의 저가경쟁을 포기하고 백기를 들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HP의 컴팩 인수는 델을 정상에서 끌어내리고 HP가 단번에 세계 컴퓨터시장의 지배력을 확보하게 할 전망이다.
◇전망 및 과제=세계 최대 매머드 업체로 탄생할 양사의 앞날이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우선 피오리나 HP 최고경영자와 카펠라스 컴팩 CEO를 비교하면 비슷한 점이 두가지 있다. 첫째 나이가 두 사람 모두 같은 46세다. 그동안 두 사람은 미국의 떠오르는 40대 CEO로 각광받아 왔다. 또 이들은 2년 전인 99년 7월말, 비슷한 시기에 각각 세계적 IT기업의 CEO에 오른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양사의 주가는 두 사람이 처음 취임했을 때와 비교하면 현재 거의 40% 정도 떨어져 있어 두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런 두 CEO의 비슷한 점에도 불구하고 캐릭터, 기업경영 스타일 등은 다르다. 피오리나가 외부지향적이고 소리나는 형이라면 카펠라스는 조용한 타입이다.
HP측에 따르면 양사의 합병은 내년 상반기에 마무리되며, 합병사의 CEO는 피오리나가, 그리고 사장은 카펠라스가 맡는다. 스타일이 다른 두사람이 양사를 어떻게 한몸으로 만들어 나갈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컴팩은 수년전 IT서비스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디지털이퀴프먼트를 인수했다가 이후 수년간 통합작업에 어려움을 겪은 경험을 가지고도 있다. 인간경영을 뜻하는 ‘HP웨이’로 유명한 HP도 최근 수천명을 감원하면서 내부적으로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상태다.
이런 와중에 컴팩과의 합병은 자칫 또 다른 인원감축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HP 직원들의 반발이 우려되기도 한다. 독점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는 미 당국의 움직임도 주목거리다. 아직 미 사법부는 양사의 합병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내놓고 있지 않은 상태지만 일각에서는 비록 미 독점당국이 양사의 합병을 조사하는 데는 수개월이 걸려 그만큼 합병작업이 늦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방은주기자 ejb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