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11월 10일. 100여일 간 미국에서 함께 생활한 민영익을 비롯한 보빙사 일행을 뉴욕 부두에서 조국으로 떠나보낸 유길준은 일본 유학시절 안면이 있던 모스 박사를 찾아갔다.
저명한 생물학자로, 당시 세일럼 소재 피바디 박물관 관장으로 재직중이던 모스 박사는 양복 차림의 동양 청년을 반갑게 맞이했고, 직업의식 때문인지 유길준이 벗어놓은 갓, 도포, 저고리, 바지, 내의, 토시, 부채, 명함 등 20여종의 소지품을 박물관에 기증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유품들은 아직도 피바디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모스 박사로부터 개인지도를 받으며 영어와 미국인들의 생활을 익힌 유길준은 새로운 것을 접할 때마다 조국을 떠올리면서 양자의 장단점을 비교했다. 조국을 개화시키는데 조금이라도 유용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구체적인 통계수치에서부터 실용성을 바탕으로 하는 미국의 사회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록했다. 이 기록이 ‘서유견문’의 토대가 된 것은 물론이다.
유길준은 이어 모스 박사의 추천으로 담마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다양한 학문을 익히게 되지만, 조국에서 발생한 정변으로 또다시 유학생활을 접어야 했다. 1884년 김옥균을 주축으로 하는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문이었다.
유길준은 다음해 여름, 미국을 출발하여 귀국 길에 올랐다.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경유하고 일본을 거치는 귀국 길이었다. 일본에서 그는 김옥균을 만났다. 김옥균. 그는 이미 나라를 전복시키려한 반역자였다. 그를 만나기만 해도 능지처참을 당하는 반역자가 되는 것이었다. 유길준이 그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김옥균을 만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저는 지금 형님(김옥균)의 처지와는 달라요. 형님들은 어떻게 됐든 한번 일을 했지만,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요. 어쨌든 들어가서 한번 부딪쳐 볼 작정입니다. 요행히 살아남아 발붙일 곳이 마련된다면 나는 국민을 계몽하는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유길준이 인천항에 도착한 것은 1885년 12월 15일이었다. 그의 귀국 사실은 이미 조정에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김옥균을 만나고 들어온다는 사실도 알고있었다. 일본 낭인 수천명을 거느리고 들어와 정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말하는 김옥균을 만나고 유길준이 귀국하는 것이었다.
유길준은 성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를 아끼는 지인이 성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잡아들여 별도 관리하는 것이 그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7년 여. 유길준은 한규설의 집과 민영익이 제공하는 별장에서 감금생활을 했다. 그 시절에 ‘서유견문’이 완성되었다.
‘서유견문’의 집필이 완료된 것은 1889년 3월이었고, 인쇄되어 책으로 발간된 것은 1895년 4월 도쿄에서였다. 당시 지식인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서유견문’에는 전신기의 발명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전신이 사용되어진 과정도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 전신은 군사용으로도 중요하다. 오늘날 각 나라에서 군사문제를 중요시하는 자들은 반드시 육군에 전신시설을 갖춘다. 지난날 보불전쟁의 전황을 들어보면, 프로시아의 승리는 전선에 많이 힘입었다. 프로시아 대장 몰트케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천하의 명장이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자기 집에 들어앉아서 여러 길로 출병하는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각기 한 가닥의 전선을 자기 집까지 연결시켰다. 그들이 일거일동을 보고하면, 몰트케는 그 내용에 따라 전신으로 군사계획을 세울 뿐이었다. 차를 마시고 술을 권하며, 꽃피는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에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이 천만 병마를 동서로 달리게 하고 좌우로 지휘하여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지었다. 이는 고금의 전쟁에서 일찍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기이한 일이어서 천하 사람들이 그의 깊고도 신비한 계교에 탄복하였다.”
이어 ‘서유견문’에는 전화기에 대한 내용이 원어기(遠語機)라는 제목으로 설명되어 있다. 소리의 원리와 전달 방법, 그 소리를 전하는 기계(전화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그것을 운용하는 전화국과 교환원에 대한 이야기도 소상하게 설명하고, 통신매체에 대한 중요성도 거론하고 있다.
1892년 11월. 유길준은 성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해금되었다. 해금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서유견문’으로 익힌 전기에 대한 지식 때문이었다. 그가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전기의 발명이 문명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 전기를 통해 전신기와 전화를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 미국인이 조선에 설치되는 전기에 관한 모든 이익을 독점하는 교섭 신청서를 제출해 왔다. 조선정부 내에는 외교를 담당하는 관리들 중에도 전기에 대한 이권이 얼마나 큰 것인지, 또 미국인이 신청한 계약문서가 어떤 것인지 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또 정부에서는 당시 재정이 극도로 궁핍하여 그 이권을 허가해 줄 생각이었다.
감금생활을 하는 동안에 종종 정부의 영어문서 번역을 수행하던 유길준은 신청문서를 번역하고 그 내용을 알게 되자 깜짝 놀랐다. 그대로 방치하면 국가 이익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길준은 지체없이 문서의 번역 내용과 함께 의견서를 제출했다.
“지금 전기사업에 대한 이권을 한 외국인에게 넘겨주면 이는 장차 우리나라에 큰 손실이 된다. 그 이권의 가치를 따진다 해도 제시된 조건보다 천 배 만 배 클 뿐 아니라, 전기사업을 한 외국인의 손에 넘긴다는 것은 나라의 중요한 부분을 잃게 되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이 교섭 신청은 즉각 기각하고 정부가 주도적으로 전기사업의 계획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
유길준의 의견서를 받아 본 정부에서는 논의 끝에 교섭 신청서를 신청한 미국인과 유길준과의 대질까지 거친 후 신청서를 기각해 버렸다. 이 사건을 통해 국왕이 유길준을 기특하게 여긴다는 말을 듣고 김홍집과 박정양 등 중신들이 유폐해제를 주창, 성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부 해금이 이루어진 것이다.
김홍집 내각에서 내부대신으로 핵심적 역할을 다하던 유길준. 그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무모한 변혁을 시도했을까. 그가 미국 신문기자에게 말했듯이 서양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시점부터 시작하려한 과감성 때문이었을까. 김옥균에게 이야기했듯이 무슨 일이든 한번 저질러 보고 싶었던 때문이었을까.
누가 하든 해야할 일이었다. 기왕 할 것이면 일거에 전국민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수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관념을 깨트려 버릴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방안으로 단발령을 추진했다. 그러나 유길준의 그 개화의 꿈은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고 무참하게 살육 당한 채 ‘서유견문’과 함께 무너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렵게 일본으로 망명한 유길준은 12년 동안 어두워져 가는 조국의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서유견문’ 한 컷 한 컷을 안타깝게 지워나갔을 것이다. 보는 것보다,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지우고 헤어지는 것이기에 그 안타까움 더 컸으리라.
망명도중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반대성명을 발표한 유길준은, 귀국 후 일본정부로부터 내려진 남작(男爵)을 거부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고은미부장 emk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