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데이비드 볼트는 ‘글쓰기 공간’이란 책에서 빅토르 위고의 소설 중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수도원의 독실 창문을 열면서 그는 웅장한 노트르담 성당을 가리켜 보았다. 두 개의 탑과 돌벽 그리고 별빛을 배경으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기괴한 반구의 천장을 지닌 성당은 도시 중간에 앉아 있는 머리 둘 달린 거대한 스핑크스를 닮아 있었다.
대집사는 잠시 아무 말없이 그 위대한 건축물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오른손은 책상 위에 펼쳐진 인쇄된 책을 향해 그리고 그의 왼손은 노트르담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는 그의 슬픈 눈이 그 책으로부터 성당으로 옮겨갔다.
“아아!” 그는 말했다. “이것이 저것을 무너뜨리고 말거야.”’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책, 그중에서도 특히 성서 출판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 지면서 종이책 가격이 폭락했다. 일반인들도 정보의 집성체인 책을 구할 수 있게 됐다. 라틴어로만 쓰여지고 오직 신부만이 읽고 소유했던 성서가 일반인의 손으로 흘러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종이책은 성당으로 대변되는 중세의 권위 전체를 무너뜨리고 만다. 이 구절은 이런 정황을 멋들어지게 보여준다.
그 후 책은 과학 발전을 주도하는 촉매제로서 500여년간 지식사회를 이끌며 중세 성당의 권위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해 왔다.
이제 ‘컴퓨터와 인터넷’이 ‘인쇄된 책’이라는 대성당을 무너뜨리고 있다. 과학·지식의 시대와 함께 광학필름, 복사기 등의 도움을 받으며 철옹성을 쌓아온 종이책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
이는 그동안 책이 가지고 있던 ‘지식과 정보를 담는 그릇’이라는 입지가 약해지는 데 기인한다.
우선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 인터넷상에 저장되고 있는 정보의 양은 수치화시킬 수 없을 정도다. 네트워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책이고 이 책은 무한한 정보의 바다다. 또 컴퓨터의 반도체칩 하나에 몇 백, 아니 몇 천권 분량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감히 인쇄된 책이 넘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닌 셈이다.
또 인터넷은 텍스트와 사진에 머무르지 않고 동영상, 음향까지 포괄하면서 그릇의 폭 자체가 다르다. 예컨대 영화평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인용하려면 사진 몇 컷을 보여주거나 줄거리를 언급하는 게 책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하지만 인터넷은 곧바로 관련 영상을 보여줄 수 있다. 어느 편이 고급 영화평이 될는지는 자명하다.
더욱이 인터액티브한 기능은 정보의 일방 통행만을 고집하던 종이책의 결정적인 약점을 보완한다. 잘못된 정보라도 한번 책이란 매체를 통하면 여과없이 독자에게 흘러드는 왜곡현상이 인터넷에서는 상당부분 제거된다. 인터넷에서 수용자는 제공자의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정보의 보완을 요구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정보제공자와 수용자간에 커뮤니티가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은 바로 정보의 보강 및 강화로 이어진다. 인터넷에 실린 정보에 대해 수용자의 정보를 덧붙일 수 있는 정보 확장의 논리는 종이책이 따라갈 수 없는 요소다.
이제 인쇄된 책은 우리 문자 문화의 주변부로 쫓겨날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컴퓨터가 결코 인쇄된 책을 대체하지 못할 것이란 반론도 적지 않다. 책은 휴대가 가능하며 전기 코드가 필요 없다. 모니터를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것이 눈에 덜 피로하다. 또 컴퓨터는 침대에 누워서 읽을 수가 없다.
하지만 입는 PC 상용화, 휴대형 단말기 개발, 블루투스 기능의 확장, 액정 모니터의 발달, 벽걸이TV 개발 등 기술의 발달은 이런 반론들을 서서히 잠재워가고 있다.
물론 책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가 책에 의해 무너지면서 본연의 위치를 새롭게 찾아냈듯 책도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인쇄된 책은 정보의 은밀한 유통통로로서 또 고상한 취향을 가진 지식인들을 위한 매체로서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쇄물과 책으로 대변되어온 지식의 표상은 마침내 500년의 화려한 역사를 마감할 시기를 마주하고 있다.
<성호철기자 hcs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