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인디컬처:디지털라이프&컬처>새로운 저장매체가 온다

 인류는 탄생 이래 서로의 원활한 의사소통과 정보 전달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지식을 축적해 온 것과 궤적을 같이한다.

 2만2000년 전 인류는 최초의 정보 전달·저장 매체로 벽화를 택했다. 에스파냐 북부 칸타브리아 지방의 알타미라 벽화에는 당시 사람들이 남기려고 했던 정보들이 남아 있다.

 또 의사소통 수단으로 언어가 의미 체계를 확립하면서 구전을 통해 정보를 전할 수 있게 됐다. 후대에 기록되긴 했지만 단군신화, 주몽신화 등도 모두 구전을 통해 이어진 정보인 셈이다.

 이후 인류는 의사전달과 역사적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도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서판조각,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 확인된 파피루스, 중국 은나라때 쓰인 거북의 등껍질 등이 그 노력의 산물이다. 특히 종이라는 의미의 페이퍼(paper)는 이 때의 파피루스(papyrus)에서 유래한다.

 중국 후한시대 채윤에 의해 종이가 발명되면서 비로소 종이가 정보매체의 중심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한다. 이 획기적인 발명품은 그 값어치만큼이나 쉽게 이웃나라로 퍼지지는 못했다. 중국의 제지술은 아랍의 정복자들이 중국인 포로로부터 종이 만드는 방법을 배울 때까지 철저하게 비밀로 지켜졌다.

 8세기 중엽 제지술은 아라비아를 통해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에 전파된다. 사마르칸트에서 바그다드를 거쳐 이집트로 전해지고 12세기에는 모로코와 스페인으로 전파되기에 이른다. 1276년 이탈리아를 거쳐 지중해를 넘어간 제지술은 1336년에 독일 뉘른베르크에 제지공장을 탄생시켰고 이어 14∼15세기에 걸쳐 오스트리아·벨기에·영국 등에 제지공장이 속속 생겨났다.

 1450년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 인쇄기술은 정보의 대량 복제를 가능케 했다. 제지술과 인쇄술이 만나면서 ‘인쇄된 책’의 시대가 열린다. 16세기에만 유럽 각국에 200여개의 인쇄소가 생겨나면서 유럽의 지식 축적 능력이 아시아를 앞지르게 된다.

 1798년 석판 인쇄술의 발명으로 종이의 대중화는 더욱 촉진된다. 18∼19세기에는 제지기술이 발달하고 화학펄프 제조법이 속속 개발돼 ‘인쇄된 책’은 일반인들도 쉽게 구해볼 수 있는 대중 매체로 거듭난다.

 이후 광학필름을 이용한 출판 기술이 일상화되면서 ‘지식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종이책은 절정에 달한다.

 20세기 말 인터넷이 도래하면서 전자책(e북)이 종이책에 도전장을 냈다. 인터넷을 통해 컴퓨터로 다운로드하여 읽는 형식의 e북은 지난해부터 출판시장을 뒤흔들 맹아로 각광받고 있다. 아직 기대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종이책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사이먼&슈스터 등 출판사와 잼스타 등 e북 리더 제조업체들은 향후 8∼10년 안에 e북이 종이책과 대등하게 될 것이라며 새로운 매체로서의 e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전자종이(e페이퍼)도 마찬가지다. 전자종이는 모양과 촉감이 종이와 똑같으면서 두루마리처럼 들고 다니면서 수백만번 지웠다 썼다를 반복할 수 있다. E잉크사는 올해 벨연구소와 함께 두께 0.5㎜도 안되는 얇고 유연한 플라스틱 트랜지스터에 색깔이 흑백으로 변하는 전자잉크를 넣어 전자종이의 원형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제록스의 첨단과학 기술연구소인 팰러앨토연구센터(PARC)는 올초 모래알보다 작은 수백만개의 입자로 구성된 얇은 플라스틱 소재의 전자종이의 상용화에 성공, 올 연말께 시장에 선보일 계획이다.

 e북과 e페이퍼가 종이책을 대체하고 정보전달 및 저장매체로 자리매김할 날이 머지 않았다.

 <성호철기자 hcs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