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동전화 인구가 2800만명에 육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를 놓고 봤을 때 두 명 중 한 명은 반드시 이동전화를 갖고 있으며 이동전화를 사용하는 인구가 그렇지 않은 인구보다 많다는 얘기다.
밤이나 낮이나, 집이나 학교·직장·거리·화장실 어디에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벨소리가 울려댄다. 이동전화 단말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비단 젊은층만이 아니다. 이동전화가 생활 속에 자리잡아가면서 다양한 연령과 생활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그만큼 다양한 이동전화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의 경우 전교에서 이동전화를 갖고 있지 않은 학생은 열 손가락 안에 든다. 연애하는 20대 남녀 가운데 문자메시지로 밀어를 속삭여보지 않은 커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제 누군가의 직업이 샐러리맨인지, 자수성가한 사업가인지, 연봉이 2000만원인지, 2억원인지를 이동전화 단말기 여부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동전화는 기호품도 부의 상징도 아닌 다름아닌 생활필수품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20대 중반 H씨의 아침=이제 갓 입사한 모 기업 동시통역사인 H씨(26)는 지난밤 알람 기능을 설정해 놓은 휴대폰 벨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휴대폰 스케줄러로 통역 일정을 확인한 후 집을 나선다.
휴대폰에 내장된 지하철 패스카드로 유유히 개찰구를 통과하고 역에 멈춰선 열차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
신문을 펼쳐들고 옆사람의 시야를 가리는 용감한 사람들 틈에서 H씨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무선인터넷에 접속해 오늘의 뉴스를 검색한다.
내릴 역 도착. 승객들 틈에 섞여 지하철을 빠져나오자 울리는 휴대폰. 김건모의 ‘미안해’가 멜로디로 흐른다. 남자친구다.
◇10대 J군의 오전 수업시간=2교시 수업 중. C고등학교 2학년 교실 안엔 소리없는 잡담이 오간다. ‘절라 배고픔 T.T’ ‘땡소리나면 매점까지 튀자’ ‘늦게 오는 넘 라면 쏘기’….
교칙상 학교 안에서 휴대폰 사용은 엄금. 특히 수업 중에는 단말기 전원을 꺼놓는 게 원칙이지만 선생님이 칠판을 향하기가 무섭게 엄지를 움직여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풍경은 이제 흔하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등 뒤로 쪽지 돌리기가 다반사던 우리네 교실문화가 빠른 속도로 디지털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앞사람의 등 뒤로 두 손을 모으고 뭔가에 집중해 있는 학생은 채팅 중이거나 게임 중이다. C군은 요즘 매직엔에 접속해 무선인터넷 게임 ‘열혈강호’에 도전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하지만 수업 중에는 자제하려고 노력한다.
◇30대 K씨의 오후 한때=점심 약속을 위해 레스토랑에 도착한 회계사 K씨. 약속시간까지 아직 10여분 남았다.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낸다. 한 손으로 휴대폰 폴더를 열고 버튼을 눌러 무선인터넷 ‘이지아이’에 접속한다.
사이버주식거래-현재가 조회로 차례로 들어가 하이닉스반도체 주가를 확인한다. 오전부터 상승세를 유지하는 걸 보니 오늘은 상한가를 칠 모양이다.
‘어제 안 팔길 잘했군. 휴우∼’
30대 중반의 K씨 또래는 무선인터넷이나 문자메시지 등 데이터서비스보다 음성통화를 주로 이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무선인터넷 증권서비스가 도입되면서 30대의 무선인터넷에 대한 관심과 접속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이들 연령대는 주식시세 조회 등에 그치지 않고 무선인터넷을 이용한 사이버주식거래로 자기가 거래하는 증권사의 웹사이트에 접속한 후 주식 매매 및 주문을 체결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50대 초반 부부의 늦은 밤시간=대전에 사는 50대 초반의 G씨와 C씨 부부. 12시가 넘어선 늦은 시간이다. 영국에 유학간 둘째 아들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잠을 설쳤다. 영국은 오후 4시경.
G씨는 휴대폰을 들고 버튼을 누른다. 007**-44-**********
G씨는 아들이 유학간 지 세달 만에 휴대폰을 구입했다. 국제전화를 걸 때는 일반전화보다 휴대폰을 이용하는 게 저렴하다는 주위의 권고 때문이었다. 국제전화요금이 여전히 부담스럽긴 하지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게 되면서 이전보다 전화거는 횟수가 잦아졌다.
서울에 사는 큰 딸 내외의 안부전화도 이동전화로 오는 경우가 많다. 딸과 사위 모두 G씨와 같은 식별번호의 휴대폰을 갖고 있기 때문에 휴대폰이 유선을 이용할 때보다 훨씬 요금이 저렴하다.
G씨 부부가 자식들에게 거는 안부전화 외에 집에서 휴대폰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문자메시지나 무선인터넷은 관심 밖이다. 큰 딸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은 적은 있지만 정작 G씨 자신은 메시지를 보내기는커녕 받은 메시지를 지우는 법도 모른다.
하지만 50대인 G씨에게도 어느새 휴대폰이 서서히 생활에서 꼭 필요한 도구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조윤아기자 forang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