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IT비전>국제 주도권 경제-기술열강 헤게모니 쟁탈 `불꽃`

 19세기 후반 증기선이 대서양 항로에 투입됐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기존 범선 업체들은 배의 길이를 늘리고 돛대를 더 많이 세워 속도를 높이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 무리한 성능 개조로 배의 안정성이 떨어진 범선들은 약한 파도에도 쉽게 침몰했다. 이후 상용 범선은 더 이상 지구상에서 건조되지 못했으며 동력선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새로운 기술과 트렌드에 대한 준비와 대처가 없다면 한 나라의 장래도 19세기 범선의 운명과 다를 바 없다. 지식정보의 총아로 불리는 정보기술(IT)에 대한 세계 각국의 지원과 정책은 이미 해당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꼽힌 지 오래다. 이에 따라 최근들어 선진국들은 포스트IT에 대한 개념정립과 해당 정책수립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포스트IT를 대비하는 각국의 준비태세는 국가적 차원의 대규모 프로젝트 성격이 짙다. 

 ◇국제 리더십 확보를 위한 각국의 포스트IT 허브 정책=포스트IT화에 대해 가장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나라는 역시 미국이다. 지난 98년부터 미국은 차세대 인터넷 구상(NGI)이라 할 수 있는 2대 연구개발 프로그램이 개시됐다. NGI는 고속의 차세대 인터넷과 애플리케이션의 개발을 지향, 연구기관을 차세대 인터넷으로 접속해 실용화 실험을 행하는 것이다.

 9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포스트IT 기본전략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민간기업이 부담하기 어려운 장기적이고 위험이 큰 기초연구를 연방정부가 수행, 포스트IT 발전 기초를 축적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부가 이러한 프로그램을 실시해 민간의 연구개발 투자를 유발하는 역할과 법·제도를 정비함으로써 자국 경제성장을 견인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포스트IT의 핵심이라 불리는 ‘그리드(GRID)’ 분야에서도 앞선 모습을 보이고 있다. 슈퍼컴퓨터센터 등 정부출연 연구소를 중심으로 지난 98년부터 다양한 그리드 프로젝트를 추진해온 미국은 수십만대의 가정용 PC를 연결, 외계의 생명체를 탐색하는 ‘SETI@Home’ 프로젝트를 본궤도에 올려 놓고 있다. 이밖에 우주항공국(NASA)의 항공기 통합설계, 미시간대 등이 참여한 지진예측 분석사업 등도 활발히 진행중이다.

 2000년대 들어 포스트IT 전략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국가중 일본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의 포스트IT 기본전략에 있어 특기할 만한 사안은 이같은 전략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1월부터 시행된 IT기본법(고도정보통신네트워크 형성기본법)은 모든 국민이 고도정보통신네트워크를 용이하게 주체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기본이념으로 한다.

 그리드 프로젝트도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포스트IT 정책의 대표적 사업 중 하나다. 일본은 지난해 아시아 각국의 슈퍼컴퓨터를 연결하는 ‘AP 그리드’ 사업에 착수, 그리드 주도권 다툼에 가세했다. 일본은 특히 원자력과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IT 초강국인 미국보다도 먼저 지식정보국가로서의 대변신에 성공한 국가가 바로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최근 21세기 국가 정보화 전략인 ICT 21(Information Communications Technology 21) 책정에 착수했다. 이는 오는 2010년까지 네트워크 경제를 확충, 싱가포르를 정보통신의 세계적 수도로 만든다는 장대한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싱가포르는 이미 지난 99년 통신성을 대신해 통신정보기술성과 정보통신개발청을 신설했다. 2000년 4월에는 자국내 통신시장을 완전자유화 했으며, 기간네트워크 사업자도 민간에 매각, 싱가포르 포스트IT화를 위한 토대마련을 끝마쳤다.

 이밖에 유럽연합(EU)도 회원국의 연구능력을 결집, 조기에 ‘e유럽’ 구현을 성사시킨다는 목표로 포스트IT 정책에 매진하고 있다.

 EU차원의 프로젝트는 물론 영국·프랑스·독일 등 개별 국가서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특히 영국에서는 과학혁신 장관이 올 초 공식석상에서 “웹을 능가할 그리드 혁명에서 헤게모니를 쥘 수 있는 나라는 영국뿐”이라고 호언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시 정부와 국책연구소 등의 주도로 포스트IT 정책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한국민은 유행에 민감하고 기술 트렌드 변화에 능동적이다. 또 포스트IT 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교육에 대한 열의도 높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슈퍼 인프라를 통한 강력한 포스트IT 플랫폼을 구축, 파워 유저에 기반한 지식정보 강국을 지향한다는 기본 방향을 설정해 놓고 있다.

 정보통신부는 최근 ‘국가 그리드 기본계획’을 수립, 세계 5위의 지식정보강국 도약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과학기술부도 생명공학(BT), 나노기술(NT), 환경기술(ET) 등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미래 도전과제를 발굴·지원하고 있다. 산업자원부 역시 자동차·조선·철강·건설·섬유 등 기존 굴뚝산업의 기술 경쟁력 향상을 위해 포스트IT를 적극 육성·발전시킨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선진국들에 비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원과 대책 마련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포스트IT와 관련된 유관 부처간 대립과 반목양상은 향후 한국의 차세대 국가 전략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세계 경제의 헤게모니, 기술 표준화 확보에 있다=1863년 미국 남북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은 철로의 간격을 남부 표준(5피트)과 다른 4피트8.5인치로 결정했다. 기술적으로는 5피트가 적합하나 남북간 물류를 차단하기 위해 이같이 표준을 정한 것이다. 그 결과 남부군은 보급 루트가 차단돼 결국 남북전쟁의 승리는 링컨에게 돌아갔다.

 포스트IT시대에 있어 기술의 표준은 국가와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고 있다. 표준을 장악한 소수 기업이 시장을 독과점하게 되면서 표준주도 경쟁이 더욱 치열해 지고 있는 것은 주지하는 바다.

 특히 정보통신의 발달로 세계 경제가 뚜렷한 동조화 현상을 보이고 있음에 따라 국제 표준의 확산과 그 파장은 가공할 만한 힘을 갖게 됐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표준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제품이 세계 교역량의 80%를 차지하고 있고, WTO의 기술장벽협정(TBT)은 세계 각국에 국제 표준의 의무 수용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추세다.

 이같은 기술표준의 중요성은 이미 세계 경제 곳곳에서 그 영향력을 입증하고 있다. PC의 표준경쟁에서 승리한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의 작년도 당기순이익률은 각각 41%와 25%를 기록했다. 표준경쟁에서 패배한 애플이 9.8%를 기록한 것에 비해 엄청난 이익률인 셈이다. 미국 모토로라는 이동통신 분야의 최강자였으나 유럽방식(GSM)이 세계 표준으로 부각되면서 노키아 등에 선두자리를 내주게 됐다. 디지털 오디오 기록매체의 업계 표준 싸움에서 소니의 MD방식이 필립스-마쓰시타의 DCC방식을 누른 것도 표준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 사례다.

 포스트IT 시대를 맞아 새로운 표준에 대한 연구와 개발이 속속 진행되면서 이같은 표준은 진보가 아닌 ‘진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차세대 인터넷 언어로 불리는 XML 프로토콜 기술과 관련, 최근 MS가 발표한 SOAP이 XML 프로토콜의 새로운 표준으로 떠오르고 있다. 신규 기술문서들과 대안이 속속 생겨나면서 경쟁력이 있으면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사장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사례다.

 한국은 고속의 산업화를 거쳐오며 선진국을 따라잡는데만 주력해 국제표준과 차세대 기술에 대한 인식이 크게 미흡한 실정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특허출원건수는 연간 8만건 이상이나 국제표준 제안은 한두건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KS표준 중 14%만이 국제표준화기구(ISO)의 규격에 부합하며 ISO·IEC 등 국제표준기구 기술위원회 가입률 역시 35%에 머물고 있다.

 DVD나 디지털카메라 등 디지털 가전제품은 특허료가 판매업체 매출액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때문에 표준과 관련된 기본특허는 선진 외국업체의 고부가 수익이 되고 있다.

 포스트IT시대에는 새로운 분야와 제품에서 다양한 기술표준이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이는 곧 신제품 개발과 상용화로 이어진다. 기술표준이 곧 고부가 수익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이제 제품을 개발하고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어 상품을 직접 시장에 내다팔지 않아도 기술표준 하나만 갖고 있으면 앉아서 돈을 버는 시대다.

 포스트IT시대 유망기술의 키워드는 정보·생명·환경이다. 포스트IT는 정신적 풍요를 추구하는 트렌드에 따라 정보·생명·환경의 3대축을 중심으로 유망기술과 그 표준이 설정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식기반의 사회 고도화에 따라 지식이 사회발전의 기반이 되며, 지식 자체가 재화화되면서 소프트·콘텐츠 및 사이버 분야가 정보화 상품으로 육성된다. 생명현상 등 인간자체가 연구 테마가 된다.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자원·에너지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표준 개발도 포스트IT의 새로운 테마로 주목받고 있다.

 <류경동기자 ninano @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