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IT를 준비한다>유럽의 선택-양자·분자 차세대 컴퓨팅 개발 두팔 걷었다

 세계 선진 8개국(G8) 정상회담이 열린 지난해 7월말 일본 오키나와. 당시 G8 정상들은 사흘간 열린 정상회담에서 정보기술(IT), 생명기술(BT), 나노기술(NT), 환경기술(BT) 등 소위 4T를 강조하며 4T가 앞으로 세계경제를 이끌어갈 핵심 엔진이라고 소개했다. 미국·일본 등 세계 1, 2위 경제대국을 위시해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들은 장차 세계 부국 서열을 바꿔놓을 4T, 즉 포스트IT 개발에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며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2000년 7월 기준 7억3000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유럽은 전세계 60억6000만명 인구의 12%밖에 안되지만 경제규모는 이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특히 유럽은 그동안 미국·일본 등에 밀리며 만년 3위의 수모를 겪어왔는데 4T를 통해 세계 최강의 자리를 뒤집기 위해 더 부심하고 있다.

 

 ◇포스트IT는 고성능 컴퓨터가 근간=생명공학, 나노기술, 환경공학 할 것 없이 포스트IT의 기본 인프라는 역시 고성능 컴퓨터시스템이다. 컴퓨터 두뇌에 해당하는 프로세서 성능은 그동안 눈부신 발전을 해왔지만 소재의 제약으로 인해 앞으로는 한계상황에 달할 전망이다. 이에따라 유럽 각국은 현재의 콘셉트(개념)와 전혀 다른 양자와 분자를 이용한 차세대 컴퓨팅 개발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컴퓨터 과학자들은 현재의 컴퓨터 방식이 앞으로 20년 안에 한계에 도달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컴퓨터의 집적도가 높아짐에 따라 전자를 제어하기 힘들어지는 양자터널효과 때문이다. 이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양자컴퓨터인데 이는 현재의 슈퍼컴퓨터보다 수천배의 성능을 낼 수 있는 꿈의 컴퓨터다.

 앞으로 양자컴퓨터가 개발되면 현재 슈퍼컴퓨터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생명공학은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영국·독일·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은 이런 이유로 국가 주도로 양자 연구를 진행하며 뭉칫돈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되기 위해서는 ‘수학의 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실 서구에서는 수학이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 경쟁력의 핵심요인으로 자리잡았다. 세계 2차대전 당시만해도 연합군이 독일 U보트를 궤멸시킨 것은 폴란드 수학자가 독일 암호체계를 풀었기 때문이다.

 현재 네덜란드에는 유럽 5개국이 연합해 만든 수학연구소가 있으며 이밖에 영국의 이삭뉴튼수리과학연구소, 독일의 막스-플랑크 수학연구소 등이 유명하다. 또 유럽은 차세대 컴퓨팅 연구뿐 아니라 인터넷, 통신망 등의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이미 10년전 인터넷과 동의어인 월드와이드웹을 세계에서 가장 처음 선보인 유럽은 이의 여세를 몰아 차세대 인터넷 인프라인 그리드 개발 등에 두팔 벗고 나서고 있다.

 최근 유럽의 선두주자인 영국은 최근 현재의 인터넷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그리드 개발에 거대한 자금투입과 국가차원의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영국 이외에도 프랑스·독일 등의 유럽 선발 국가들은 차세대 컴퓨터개발 선점에 한치 양보없는 팽팽한 샅바싸움을 벌이고 있다.

 

 ◇생명공학 열기 후끈=‘포스트IT’하면 떠오르는 것은 고성능 컴퓨터와 함께 생명공학이다. 복제 양 둘리를 처음 선보인 유럽은 미국, 일본 못지 않게 생명공학분야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며 포스트IT시대에 대비하고 있다.

 유럽의 생명공학 투자를 잘 대변해주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 에번스인데 그는 스스럼없이 “유럽 최고의 생명공학사업가”라고 자칭한다. 지금까지 그는 첨단과학 기업 17개 업체를 영국에 세우는 등 이 분야에서 앞서가고 있다. 그는 “유럽은 생명공학 분야에서 미국을 따라잡고 있는가”라는 명제에 “게놈 프로젝트 붐이 갑자기 일어났을 때 그것은 소행성이 지구를 덮친 것과 같았다. 그에 따라 미국의 생명공학 물결은 순식간에 거대한 파도로 바뀌었다. 유럽도 올해 이 파도를 탔다. 그러나 유럽의 생명공학 연구는 미국에 비해 매우 느리고 미숙하다. 아마 가장 거대한 파도는 앞으로 2, 3년 후 밀려올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수많은 투자가들이 바이오 기업에 투자하면서 지금 유럽은 생명공학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는 바이오 산업이 앞으로 포스트IT를 먹여 살릴 효자산업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에번스의 경우 특히 독일을 겨냥해 투자하고 있는데 그는 “유럽의 바이오 기업 1100곳을 데이터베이스화해 조사한 결과 독일의 생명공학 산업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독일은 수년전부터 생명공학 산업에 규제완화를 실시하는 등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유럽에서 앞서 이 분야를 후원해왔다.

 세계적 컨설팅업체인 언스트&영의 독일지사가 올해 5월 유럽의 생명공학 산업 현황을 분석한 ‘유럽 생명공학 리포트 2001’에 따르면 독일의 생명공학 기업은 2000년 19%가 늘어난 332개로 유럽 전체의 1570개 가운데 약 20%를 차지했다. 영국은 281개사로 독일 뒤를 이어 2위를 기록했는데 독일의 경우 특히 총 매출액과 종사자 수에 있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독일 연방교육연구부(BMBF)는 언스트의 조사결과에 대해 환영의 뜻을 표하며 생명공학진흥 정책을 계속 시행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BMBF의 고위 관계자는 특히 중소생명공학 기업 및 창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이밖에 언스트 보고서는 독일 생명공학 산업의 특성으로 스크리닝 로봇을 개발하고 있는 사이비오, DNA 염기해독 서비스를 제공하는 MWG바이오테크사 등이 신약 개발보다 플랫폼 기술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영국도 독일 못지 않게 생명공학 관련 산업에서는 유럽에서 제일가는 기술과 규모를 자랑한다. 이는 세계 3000여 생명공학 관련기업 중 4분의 1이 영국에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중 유전공학·분자생물학 등 생명공학 분야의 벤처기업만도 수백곳에 달하며 관련 종사자 수도 수만명을 헤아린다. 특히 영국내에서도 스코틀랜드는 넓은 땅과 자연환경 등 천연적 입지조건으로 신생 벤처기업들이 몰려들어 첨단 생명과학 분야의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다.

 연구성과에 있어서도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추격을 불허하고 있는데 복제 양 둘리로 유명한 에든버러의 로슬린연구소가 대표적이다. 영국의 생명공학 분야에서의 성과는 영국 정부가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명공학 연구에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현행법은 인간배아의 실험을 이미 허용하고 있다. 또 영국에서는 정부출연연구기관과 사설생명공학기업, 그리고 대학연구소 등의 연계도 활발한데 로슬린연구소의 경우 14.5㏊의 넓은 대지의 로슬린바이오센터 내 로슬린연구소와 PPL테라퓨틱스 등 벤처기업과 에든버러대학의 생물연구소 등 8개 기관이 상호 네트워크를 이루며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정부 정책의 이같은 유연성과 원활한 네트워크가 유지되다보니 영국의 연구성과가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나노기술=포스트IT의 주역으로 나노기술도 빼놓을 수 없다. 나노(nano)는 작다는 뜻인데 고대 그리스어의 난쟁이를 의미하는 나노스(nanos)에서 유래됐다. 만약에 우리가 야구공을 지구만한 크기로 확대하면 원자들은 포도송이 만한 크기로 확대되는데 이 원자들을 서너개 정도 나란히 놓은 것이 바로 나노미터 안에 들어간다.

 나노테크는 이처럼 작은 물질을 연구하고 다루는 것을 말한다. 향후 국부를 좌우할 나노기술에 미국과 일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가며 투자를 늘리고 있는 가운데 유럽 각국도 나노기술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올해 초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산업박람회 ‘하노버 메세 2001’에 참가한 독일엔지니어협회(VDI)는 나노테크놀로지 응용분야를 소개해 눈길을 모았다. 이 협회는 당시 나노기술의 세계 현황, 독일의 발전전략, 앞으로의 과제 등을 개관하는 한편 98년부터 진행해온 독일 나노테크놀로지 연구네트워크에 대한 주제발표를 해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독일엔지니어협회는 당시 주제발표에서 “나노기술은 물리학·생물학·공학을 가로지르는 원천기술로써 차세대 핵심기술”이라고 강조하며 “독일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나노테크놀로지 분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개발활동을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협회에 따르면 현재 의학·화학·물리학·공학 등 광범위한 나노테크놀로지 응용분야에서 160여개 연구기관과 160여개 기업체가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은 각 세부 분야의 시장에서 독일 경제의 경쟁력 확보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협회는 장기적으로 상품화가 가능한 응용분야와 제품군으로 △안정성 높은 대용량의 소형정보저장매체 △슈퍼컴퓨터의 성능을 가진 PC △대부분의 클래식음악을 수록한 CD △1000시간 분량의 영화를 수록한 소형칩 △멀티미디어(CD, DVD)용 광다이오드 및 레이저다이오드나 에너지절약형 조명 △자연 광합성 원리를 응용한 새로운 태양광전지 △재생가능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는 저렴한 수소저장매체 등을 제시했다.

 또 BMBF는 올들어 새로운 나노바이오테크놀로지 진흥프로그램의 일환으로 1차 연구프로젝트 21개를 선정,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뇌종양 치료를 위한 나노입자 기반 기능체계(프랑크푸르트대학) △자연적, 인공적 바이오튜브 생산을 위한 살아있는 세포 활용방안(훔볼트대학) △금속·반도체 나노구조에 기반한 생화학적 합성 등이 들어갔다.

 독일의 한 당국자는 이번 프로젝트 선정 자리에서 “언스트&영이 발표한 유럽생명과학보고서에서도 나노를 21세기의 핵심기술 가운데 하나로 규정했다”고 상기시키고 “나노기술은 전자공학, 재료, 분자 등의 기술을 생명공학 및 유전공학과 결합하고 통합하는 새로운 핵심기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나노기술은 응용분야가 광범위해 경제적, 의학적, 기술적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덧붙였다.

 ◇환경공학=포스트IT시대에는 환경분야도 당당히 한축을 차지한다. 환경공학 역시 유럽의 여러 국가 중 독일의 기술과 제품이 앞서있다. 유럽의 유수한 조사기관들이 수년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유럽 환경보호시장의 전체 매출액 중 독일이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뒤를 프랑스·영국·이탈리아·네덜란드 등이 잇고 있다.

 올 2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산하 환경총국은 2001년도 수행 연구과제와 구체적 사업내역을 발표하면서 환경을 공학적 차원에서 차세대 사업으로 선정하고 육성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유럽연합은 2005년까지 총 에너지의 5%, 그리고 2010년까지 12%를 바이오 에너지로 대체할 계획이다.

 <방은주기자 ejb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