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은 IT를 포함한 신경제의 대세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처음에는 슈퍼컴퓨터나 초고속인터넷과 같은 하나의 발명품으로만 여겨졌던 디지털이 이제는 새로운 문명의 분기를 이루고 있다. 이름하여 디지털문명은 개인의 삶을 이끌어가는 생존조건으로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약속하고 있다.
많은 인류학자들은 디지털을 인류문명 진화의 최근 단계로 받아들이고 있다. 프랑스의 석학 피에르 레비(캐나다 퀘벡대 교수)가 대표적인 경우다. 레비 교수는 ‘사이버문화’라는 저서를 통해 인류가 언어와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동물과 결별하고 ‘호모 사피언스’가 됐다면 이제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사용함으로써 ‘호모 디지털’로 바뀌었고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니게 됐다고 주장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실제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인류에게 그동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능력을 선사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한계상황이었던 시공의 물리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줬다. 컴퓨터와 인터넷만 있다면 빛의 속도로 세계 곳곳을 여행할 수 있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쳐다보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특히 인간의 감각마저도 디지털화함으로써 예술과 문화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어놓고 있다. 현재까지 인간 오감 중에서 시각과 청각만을 디지털화했을 뿐이지만 향후에는 냄새, 감각, 미각 등을 디지털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의 상상력까지도 디지털화한다면 현재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디지털문화는 자유를 모토로 하고 있다. 그동안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문화를 전세계 네티즌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디지털은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아날로그의 수직적, 그래서 권위적인 문화는 설 자리가 없다. 산업사회의 아날로그적인 문화상품은 작가를 비롯한 소수계층만이 생산하고 출판사, 배급사 등이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디지털문화에서는 이런 수직적 구조가 와해된다. 생산, 유통, 소비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소비자가 직접 생산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예컨대 냅스터나 소리바다의 경우처럼 누구나 MP3파일을 만들어 인터넷을 통해 배포함으로써 작곡가, 가수가 될 수 있다. e북이라는 매체를 이용하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최근 10대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소비자 스스로 문화상품의 제작자, 배급자가 된다.
디지털문화시대에는 작가와 소비자의 역할도 크게 바뀐다. 미국의 문화비평가 제레미 리프킨이 최근 저서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에서 ‘나는 접속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요약한 것처럼 디지털문화에서 작가나 작품의 원형적인 아우라(aurae)는 사라지고 접속과 공유만이 남는다. 소위 말하는 하이퍼텍스트 형태로 주어지는 디지털문화상품은 소비자의 적극적인 상호작용(interactive)을 통해 순간적으로 완성된다.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의 꽃으로 비유되는 게임의 경우 사용자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그 화려하고 다이내믹한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TV나 영화의 경우도 사용자가 교감하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방향으로 특성이 바뀌고 있다.
디지털문명과 문화가 꽃을 피우면서 ‘디지털 디바이드’라는 인류 초유의 사회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전세계 인류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생존조건에 적응한 디지털종족과 도태된 아날로그종족으로 나뉘고 있다. n세대로 대표되는 디지털종족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자신의 신체 일부로 여기면서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 채팅과 같은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에 탐닉하고 있다. 이들은 0과 1이라는 비트로 만들어진 디지털문명과 사이버월드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색깔로 새로운 인디문화를 창출해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이동전화망을 기반으로 한 무선인터넷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면서 기존의 n 세대와 다른 새로운 디지털종족인 모티즌(motizen)이 생겨났다.
전철, 길거리, 도서관, 카페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휴대폰의 작은 자판을 두드려 엄지족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이들 모티즌은 PC와 네트워크 대신에 이동전화와 PDA를 들고 다니면서 움직이는 인터넷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문화와 유행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처럼 화려하고 다이내믹한 디지털의 세계에도 함정은 있다. 무엇보다도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통해 개인의 사생활을 포함한 온갖 정보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은 디지털 족쇄에 매인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다. 또한 디지털이 만들어내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구조주의적 통합성을 지닌 개인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소외로 인한 다양한 역작용도 우려된다.
다행히 디지털월드라는 새로운 세계의 질서는 아직까지 결정되지 않았다. 디지털월드가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를 재생산할지, 아니면 모든 네티즌에게 열려 있는 유토피아가 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창희기자 changh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