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주한미군방첩대(CIC) 요원이었음을 밝히는 문건이 공개되었다.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가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이 백범 암살 3일 뒤인 1949년 6월 29일에 작성한 보고서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하여 공개한 것으로, ‘김구:암살에 관한 배후정보’란 제목의 미 육군 정보국 문서파일에 3급 비밀문서로 분류되어 있는 문건이다.
이 문건에서 조지 실리는 “안두희(Ahn Tok Hi)는 한국인 청년으로 이 비밀조직(백의사)의 구성원이자 이 혁명단 제1소조 구성원”이라면서 “나는 그를 (한국주재 CIC의) 정보원(informer)으로, 뒤에 한국주재 CIC의 요원(agent)으로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CIC 요원으로 드러남에 따라 그 배후에 미국이 개입돼 있다는 그 동안의 의혹이 사실일 가능성을 한층 짙게 해주고 있는 가운데, 백범 김구의 삶도 새롭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내 첫번째 소원은 대한독립이요, 두번째 소원도 우리나라의 독립이요, 세번째 소원도 오로지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외친 백범 김구. 이봉창 의사의 일본 천황 저격사건,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사건 등을 주도하여 우리 민족의 건재와 자주독립 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주고,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그들의 침략성에 경종을 울려주었던 백범 김구.
남북분단이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역사적 난국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어 비장한 각오로 38선을 넘으면서까지 민족통일을 염원했던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13시 20분 경교장 2층에서 당시 포병장교였던 안두희가 쏜 총탄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45구경 미제 권총에서 발사된 네발의 총탄이 이제 역사의 궤를 뚫고 다시 우리 앞으로 다가서고, 그 희생자인 백범의 삶도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백범은 항일운동 최전선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유서를 대신하여 기록한 ‘백범일지’를 남기고 있다. 상·하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백범일지’의 상편은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의 글이며, 하편은 본인의 파란만장한 조국 광복투쟁사로 엮어져 있는데,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죄로 사형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고종의 전화 친칙을 통해 극적으로 살아나게 된 내용이 있어 관심을 끈다.
백범은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된 뒤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만주로 피신한 뒤 1896년 귀국,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치하포에서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백범은 인천감옥에 수감되었고, 재판결과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사형집행 바로 직전 고종의 전화에 의한 특사로 감형되어 목숨을 구했다는 내용이다.
특히, 그 전화는 서울과 인천간을 잇는 장거리전화가 개통된 지 3일밖에 되지 않은 때로,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의 전화가 미처 개통되지 않았더라면 중국 대륙을 주름잡으며 불굴의 항일운동을 전개한 민족지도자의 출현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은 ‘백범일지’ 해당 부분의 내용이다.
이윽고 끌려갈 시간이 되었다. 그때까지 성현과 동행할 생각으로 ‘대학’만 읽고 앉아 있었으나 종내 아무 소식이 없어 그럭저럭 저녁밥까지 먹게 됐다.
사람들은 창수(김구의 어릴 때 이름)는 특수이기 때문에 야간집행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밤 초경이나 되었을 때 사람들의 붐비는 소리가 들리더니 옥문 여는 소리가 났다.
“옳지, 지금이 나로군!”하고 앉아 있는데, 내 얼굴을 보는 다른 죄수들은 마치 자기가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벌벌 떨어대는 것이었다. 안쪽 문을 열기도 전에 옥 뜰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창수, 어디 방에 있소?”
“이 방이오.”
“아이구, 이제 창수 살았소! 각 청사 직원들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밥 한 술 뜨지 못하고, 창수를 어찌 차마 우리 손으로 죽인단 말이야 하고 한탄했더니, 지금에사 대군주 폐하께옵서 대청에서 감리 영감을 불러 김창수 사형을 정지하라시는 친칙을 내리사, 밤이라도 옥에 내려가 창수에게 전지하여 주라는 분부를 듣고 왔소. 오늘 하루 얼마나 상심하였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때 관청 수속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대략 이렇게 짐작했다. 먼저 이재정이 공문을 받고 상부, 즉 법부에 전화로 교섭한 것 같다. 그 후 대청에서 나오는 소식을 들으면, 사형은 형식적이나마 임금의 재가를 받아 집행하는 법이기 때문에 법무대신이 사형수 각 인의 공술을 가지고 상감 앞에 놓고 친감을 거칠 때, 입시했던 승지 한 사람이 각 죄수 공술을 넘기면서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눈에 띄어 이상히 여긴 나머지 재가수속을 마친 안건을 다시 내어 임금에게 올렸다. 대군주는 그것을 읽자 즉시 어전 회의를 열고 의결을 한 결과, 국제관계니만큼 일단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 하면서 전화로 친칙했다 한다.
어쨌든 대군자가 직접 전화한 것은 사실이다. 이상한 일은, 그 사이 경성부 내는 이미 전화가 가설된 지 오래지만 장거리전화로 인천까지의 전화가설공사가 끝난 것은 겨우 3일 전의 일이었다. 병신 8월 26일(양력 9월 29일)로, 전화가 개통된 지 3일째 되는 날인데, 만일 전화선이 놓이지 않았더라면 사형이 집행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백범일지’에 나타난 전화개통 일자가 전기통신 역사 측면에서 볼 때 검증이 안되었고, 씌어진 시기가 사건발생 한참 후의 일이라 신뢰성의 문제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전화를 통하여 생명을 구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3개월 만에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되었고, 6·25 동란 와중에 소위로 복귀해 형 면제조치를 받았다. 소령으로 예편 후에는 군납업체를 운영하며 한때 강원도에서 두번째로 세금을 많이 내는 사업가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안두희가 미국 CIC 요원이었고, 어떠한 형태로든 미국이 그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그의 행적을 보아도 쉽게 예측 가능한 사실로 우리에게 안타까움을 준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민족지도자의 암살에 관한 자료조차도 미국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민족반역자라는 오명을 끝까지 떨치지 못한 안두희는 1996년 한 시민의 몽둥이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