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성역으로 여겨졌던 산업전자분야에서도 여성 최고경영책임자(CEO)들의 행동반경이 크게 넓어지고 있다. 지면에서 소개할 네명의 여성 CEO, 정희자 오토피스엔지니어링 사장, 강필경 아이디테크 사장, 최정애 이컴앤드시스템 사장과 전소연 지암메디테크 사장은 척박한 산업전자분야에서 보기 드문 여성 경영인이란 점이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편집자◆
◇정희자 오토피스엔지니어링 사장
오토피스엔지니어링의 정희자 사장(47)은 우리나라에 벤처란 개념조차 생소하던 지난 93년 기술위주 일류기업을 목표로 시스템통합(SI)사업을 시작했다. 실내 인테리어업을 하던 정 사장이 마흔이 넘은 나이에 생소한 사업에 뛰어들자 주위의 만류도 많았지만 배짱좋게 자금난에 처한 중소기업을 인수한 후 곧바로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정 사장은 우선 대형유통시장에서 쓰이는 경매시스템을 독자개발해 지난 95년 양재동 화훼단지에 설치했다. 뒤이어 지하철 역무자동화와 원격제어장치를 국산화하고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지하철 관련 설비시장을 잇따라 뚫어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지하철 운행을 제어하는 관제실과 차량을 연결해 운행을 통제·지시하는 지하철시장은 승객의 안전과 직결돼 신규업체에 배타적인 풍토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 사장의 집요한 노력은 일본·프랑스의 유명기업을 물리치기에 이르렀다.
현재 서울시 지하철 3·4호선의 신호제어시스템과 부산 지하철 2호선의 승차권관리시스템은 정 사장의 작품이다.
중소기업으로서 이처럼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에 대해 정 사장은 현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찾아나서는 기업풍토가 바탕이 됐다고 설명한다.
오토피스는 지하철 설비 외에도 온라인복권단말기, 네트워크장비 판매, 관광용 키오스크 등 실로 다양한 아이템에 손을 대고 있다. 정 사장은 이밖에도 GPS위성장치와 학생증통합시스템을 제작하는 팬텀테크놀로지란 방계회사까지 새로 만들어 도전하고 있다. 일에 대한 그의 욕심은 정말 대단하다.
정 사장은 “여성기업인으로서 부딪히는 각종 어려운 상황은 결국 여성경제인구의 증가로 인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말로 후배 여성기업인들을 격려한다.
◇강필경 아이디테크 사장
아이디테크(http://www.idteck.com) 강필경 사장(40)은 RF 무선인식 분야에서 최고의 회사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13년전 간호사였던 강 사장은 우연한 기회에 외국업체의 국내총판을 맡았고 이후 꾸준한 기술개발로 100% 국산화에 성공하는 의지를 보였다.
“처음에는 ID카드시스템을 하다가 바코드, 마그네틱카드, 지난 96년 RF사업에 뛰어들어 99년 100% 국산화에 성공했습니다.”
강 사장은 낯선 분야였지만 꾸준히 차근차근 기술을 쌓아나가 결국 무선인식분야 최고회사라는 목표가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할 태세다.
그만큼 최고의 기술, 최고의 인력이 최고의 회사를 만들어 낸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강 사장은 “여성 CEO로서의 장점은 여성특유의 섬세함”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강 사장의 장점은 추진력과 신념인 것처럼 보인다.
아이디테크는 물건을 수입해 오던 모토로라에 제품을 역수출하는 쾌거를 얻어내 3년간 3000만달러 규모의 수출물량을 확보하는 한편 RF기술을 이용한 물류시장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최고 1.5m까지 장거리 인식이 가능한 13.56㎒ RF시스템을 개발해 바코드 위주의 물류시스템을 대체한다는 것.
강 사장은 RF기술분야에 여성 CEO가 흔치 않아 자신에게 쏠리는 특별한 대우를 부담스러워 하지 않고 오히려 호기로 만드는 적극적인 사고로 최고의 RF업체를 향한 길을 이끌어 내고 있다.
◆전소연 지암메디테크 사장
장애인용 리프트(승강기) 전문업체인 지암메디테크(http://www.jiammeditech.co.kr)의 전소연 사장(51)이 사업가로 변신한 동기는 지극히 단순명료하다.
왜 리프트사업을 시작했냐는 질문에 대해 전 사장은 “그저 장애인을 돕고 싶어서”였다고 대답한다.
창업동기가 자아성취, 금전적인 이유가 아니라 이처럼 휴머니즘에 기초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뒤 의대 교수와 결혼해 미국유학, 귀국후엔 강남의 대형병원 운영을 맡게 된 그녀는 경력에서도 나타나듯 순탄하고 유복한 삶을 꾸려왔다.
전 사장은 교통사고 응급환자가 매일 실려오는 대형병원을 운영하면서 국내 장애인들의 열악한 복지환경을 개선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장애인을 위한 기초시설 투자에 철저히 인색한 우리나라의 현실과 유학시절 봤던 미국의 장애인 복지환경이 자꾸만 대비됐던 것이다.
그녀는 어느날 지하철역에서 휠체어를 탄 채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려는 장애인을 목격하면서 인생진로가 바뀌게 된다.
그 장애인이 지하철을 타도록 옆에서 도와주면서 전 사장은 당시 국내 지하철에 설치된 계단형 휠체어리프트가 장애인 혼자서는 도저히 사용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성능·안정성도 미흡해 장애인의 이동권을 심각하게 제약한다는 점을 파악했다.
“정말 화가 났죠. 한마디로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권할 만한 시설이 아니었어요. 외국에선 엘리베이터와 유사한 수직형 휠체어리프트가 많이 보급돼 장애인 혼자서도 지하철을 타는 데 문제가 없었거든요.” 당시를 회상하자 전 사장의 음성톤이 올라간다.
국내 산업계를 통틀어도 장애인의 수직이동에 필요한 수직형 리프트 제조업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차라리 직접 나서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어차피 시장전망·수익성 따윈 상관없었다. 장애인에게 꼭 필요한 기초시설을 국산화하는 일에 대해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 사장은 지암병원의 운영을 딴 사람에게 맡기고 지난 97년 지암메디테크를 설립했다.
인본주의에 기초한 이상적인 사업이 대부분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되듯 지암메디테크가 맞닥뜨린 시장상황도 혹독했다.
수직형 휠체어 리프트의 국산화에는 성공했지만 영업력 부족으로 창업이후 2년간 단 한대의 리프트 수주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고 연이어 외환위기까지 맞았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장애인 복지에 대한 전 사장의 열정과 기술개발 노력은 차츰 인정을 받아 지난해 이후 회사운영은 정상궤도를 타기 시작했다. 올들어 지암메디테크는 수직형 휠체어뿐만 아니라 주요 관공서의 승강기 주문이 계속 밀려들어 특수승강기 전문업체로 확연한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
전 사장의 가족환경을 살펴보면 2남1녀 중 두 명이나 의대에서 재활의학을 전공하고 장애인 복지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평소 부모가 반듯한 인생을 사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자식교육이라고 했던가.
그가 뒤늦게 시작한 사업을 통해 큰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자식농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전 사장은 자기 사업을 꾸려오는 데 있어 주변환경이 돕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다고 술회한다.
이해심 많은 전문직 남편과 장성한 자식들, 대형병원이라는 든든한 수익원 등 그를 도운 주변환경은 자수성가한 다른 여성 CEO에 비해 훨씬 좋은 편이다.
그러나 딴 사람보다 많은 조건을 갖춘 우리나라의 상류층 여성 상당수가 사회의식이 결여된 채 아파트 평수 늘리고 제 자식 키우는 데만 골몰하는 현실에서 전 사장이 인생을 사는 방식은 매우 돋보인다.
돈 안되는 줄 알면서도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돕기 위한 복지시설사업에 동분서주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사회적 덕목에 충실한 여성기업가로 추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느껴진다.
◇최정애 이컴앤드시스템 사장
바코드 전문업체인 이컴앤드시스템(http://www.ecomm4u.com)의 최정애 사장(46)은 미술로 치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젊은 시절부터 차근차근 깍아들어가 완성시키는 조각가 스타일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최 사장은 세계적인 미국계 은행인 JP모건의 한국지사에 들어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0년간 컴퓨터 관련 업무를 맡아 보며 커리어우먼으로 경력을 쌓던 그는 어느날 모험을 감행했다.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고 여성에 대한 대우도 좋던 외국계 은행을 박차고 국내 중소업체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한국기업내에서 초라해진 자신의 위치에 한때 갈등을 겪었으나 최 사장은 차분히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바코드리더기의 무역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보통 사람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성실함과 대인관계·신뢰성을 무기로 자동인식용 바코드리더기 시장과 기술 흐름을 하나씩 파악해 나가면서 국제적인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지난 97년 그는 자동인식장비의 국산화를 목표로 새로이 자신의 회사를 세웠고 해외유수의 바코드 전문업체와의 촘촘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최신 바코드제품의 국내생산에 들어갔다.
해외딜러들이 먼저 거래를 제의해올 정도로 신용을 쌓은 최 사장은 최근 세상을 깜짝 놀랠 바코드 관련 기술을 개발했다.
휴대폰의 액정판에 바코드를 뛰워 ATM기·버스요금기에 쓰는 신용카드를 대체하는 기술을 국산화한 것인데 이컴앤드시스템에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줄 효자상품이다.
“이 기술은 휴대폰 하나로 각종 은행업무에서 택시비 지급, 영화티켓 구매까지 모두 가능하게 만듭니다. 정말 멋지죠.”
최 사장은 특정 기술분야에 문외한이더라도 꾸준한 노력을 거치면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자라고, 잘 모른다고 사업과정에서 기죽을 필요 없어요. 단지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노력만이 여성기업인을 성공으로 이끄는 법입니다.”
20년간의 직장경력끝에 CEO로서 대박을 터뜨린 최 사장은 후배 여성기업인들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