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업은 감성과 느낌을 팔고 사는 비즈니스다. 자동차나 컴퓨터처럼 성능과 품질을 판단할 잣대가 분명치 않다. 설령 예술적인 가치가 높고 품격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소 천박하고 완성도가 낮더라도 트렌드를 따라 잡으면 인기를 얻는다.
문화산업분야에서는 승자와 패자의 명암이 너무나도 극명하다. 소위 말하는 대박을 터뜨리면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거머쥐지만 흥행에 실패하면 원가는 고사하고 빚을 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한 순간에 천당과 지옥을 오갈 수 있는 문화산업은 어찌보면 도박과 유사하다. 판돈 대신에 대박을 꿈꾼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부가가치가 높지만 리스크 역시 큰 문화산업분야에서 성공하려면 CEO는 문화중심 세력의 트렌드를 찾아낼 수 있는 감수성과 창의력은 기본이다. 여기에다 매 순간의 리스크와 투자가치를 빠르게 계산해 낼 수 있는 순발력, 자신의 직관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배짱도 있어야 한다.
코스닥 등록기업인 소프트맥스의 정영희 사장(37)은 이같은 자격을 모두 갖춘 여성 CEO다. 여성으로서의 문화적 감수성에다가 웬만한 남성은 엄두도 내지 못할 두둑한 배짱까지 겸비하고 있다.
“문화산업분야의 CEO는 일반적인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갖고 있는 경영수완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감수성을 지녀야 합니다. 또한 여러 사람들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년 동안 공동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조직관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여성 특유의 셈세한 감수성과 포용력은 상품기획은 물론 전체 조직을 원활하게 이끌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정 사장은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문화산업분야에서는 여성적 특성이 CEO로서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고 밝혔다. 이런 까닭인지 몰라도 정 사장은 93년말 ‘구멍가게’ 크기로 창업한 소프트맥스를 8년 만에 코스닥 등록기업으로 키워놓았다.
문화산업의 각 분야에서 여성적 특성을 장점으로 살려 성공을 거둔 CEO들은 10여명에 이른다.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여성 CEO까지 합치면 20여명을 넘어 선다. 가히 문화산업은 ‘여인천하’다.
어느 분야보다 게임산업계에서 여성 CEO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90년대 중반 이후 시장이 형성된 PC, 온라인, 모바일게임분야에서는 여성 CEO가 창업한 업체들이 리딩 컴퍼니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정영희 사장이 창업한 소프트맥스는 국산 PC게임 개발사 중에서 넘버1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서도 게임 명가로 인정받고 있다.
온라인게임업체인 마리텔레콤의 장인경 사장(49)은 화려한 경력과 카리스마로 게임업계의 대모 역할을 하고 있다. 장 사장은 지난 71년 여성으로는 최초로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화제를 모았으며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삼성전자 등을 거쳐 94년 7월 당시로서는 사업개념조차 명확지 않았던 온라인게임개발사를 설립, 이 시장을 일구어냈다. 장 사장은 휴대폰을 이용한 모바일게임분야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해냈으며 최근에는 미국 시장 개척에 힘을 쏟고 있다.
국내 5대 온라인게임업체인 제이씨엔터테인먼트를 창업한 김양신 사장(48), 국내 10대 배급사 중 하나인 비스코의 창업자 이지영 사장(38), 최근 국내 최초로 3D 온라인게임 ‘뮤’를 발표해 화제를 모은 웹젠의 이수영 사장(34) 등도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낸 여성 CEO로 꼽힌다.
최근에는 게임에 대한 전문가 수준의 노하우을 갖고 창업한 20대 여성 CEO들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컴투스의 박지영 사장, 이매그넷의 권선주 사장, 메가폴리소프트웨어의 김소연 사장, 라온엔터테인먼트의 김윤정 사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신세대다운 문화적 감수성과 대담함으로 각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올해 27세의 박지영 사장이 창업한 컴투스는 휴대폰을 이용한 모바일게임시장에서 넘버1이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여성파워가 미약했던 영상분야에서도 90년대 중반 이후 선이 굵은 여성들이 잇따라 창업했다. 지난 96년 영화티켓 등의 온라인예매 전문업체인 지구촌문화정보서비스를 창업한 우성화 사장(37)이 대표적인 인물. 숙명여대와 연세대대학원을 졸업한 우 사장은 웬만한 남자들도 견뎌내기 힘든 영화판에서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티켓링크라는 이름의 극장예매 전산시스템을 구축해냈다. 우 사장은 이 공로로 2000년 행정자치부 장관 포창까지 받았으며 현재는 명지대와 숙명여대의 대학원에서 후배교육까지 병행하고 있다.
영화직배사인 파라마운트의 서영심 사장, 브에나비스타의 임혜숙 사장 등은 아직까지 여성인력이 뿌리내리지 못한 영화판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여성 CEO들이다.
최근들어 각광받고 있는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도 여성 CEO들이 발군의 경영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이트스톰미디어의 최안희 사장(53)은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 1세대로 81년 세영동화를 창업했다. ‘까치’ ‘독고탁’ ‘2020원더키드’ ‘은비깨비의 전래동화’ 등과 같은 수작을 만들어냈다. 최 사장은 지난해 2월 미국의 사바엔터테인먼트, 젠엔터테인먼트 등과 함께 나이트스톰미디어를 설립해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최 사장은 애니메이션에서 캐릭터, 위성방송 등으로 사업확대를 꾀하고 있다.
이밖에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아툰즈를 운영하고 있는 이진희 사장, 5년동안 방송시청률조사라는 한우물을 판 티앤에스미디어의 민경숙 사장, 캐릭터 전문업체 위즈엔터테인먼트의 박소연 사장, 멀티콘텐츠 개발업체인 아이코의 정진영 사장 등도 해당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낸 입지전적인 인물들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 여성 CEO는 경영하는 기업의 규모에 관계 없이 가부장적인 유교전통과 남성중심의 사회체제라는 안팎의 멍에를 짊어지고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높이 날고 있다. 이들이 여성·어머니·며느리라는 핸디캡 때문에 추락하지 않도록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는 일은 남성과 정부의 몫인 것 같다.
<이창희기자 changh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