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CEO>유통업체-거친 유통업체에도 `여장부`들 맹위

전자 유통업계는 다른 업종에 비해 여성이 근무하기에는 환경이 척박하다.

 거칠기만한 유통업계에서는 여성CEO들이 살아남는다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인터넷 쇼핑몰들의 가격공세가 심화되기 시작한 이후로는 그동안 건실했던 유통업체들도 하나둘씩 경쟁의 대열에서 밀려나고 있는 상황에서 유통이라는 외곬 인생을 살아온 이들이야말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여장부들이다.

 불과 5년전만 하더라도 전자 유통업계에서 여성들은 단순히 보조 역할이었다. 남편의 사업을 도와주거나 한 업체의 직원으로서 그저 묵묵히 정해진 일만 하던 소극적인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몇몇 여성들은 나름대로 억척스런 삶을 살아 지금은 어엿한 CEO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니 CEO뿐만 아니라 CFO도 겸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명목상으로야 어떻든 실제로는 이들이 매장을 하루 종일 지키고 주문을 내며 소비자들과 부딪히며 유통현장에 있다. 주위에 남편이나 인척들도 있지만 이들은 단순히 협력자일 뿐 주인공은 여성 CEO 자신이다. 시장의 흐름을 명확히 꿰뚫고 있는데다 기업 유지의 핵심요소인 자금관리를 철두철미하게 하기 때문이다.

 국내 전자유통의 대표격인 용산에는 이런 여장부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컴퓨터와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가전 유통업계에도 여성 CEO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덩치가 큰 가전제품의 특성상 여성 CEO는 드물다. 반면 컴퓨터 관련 제품은 부피도 적고 가벼워 남자직원이 없어도 판매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어 누구라도 CEO가 될 수 있다.

 용산의 컴퓨터 업계만 놓고 보면, 대표자로 돼 있거나 남편과 같이 사업을 하되 실질적으로 매장을 직접 운영하고 있는 여성은 대략 7∼8%선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김이갑 선인컴퓨터상우회장은 ”최근 들어 용산에 여사장들이 많이 늘고 있다”며 “사업자등록 신고만 여성으로 돼 있는 경우까지 모두 합치면 10%정도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진전자월드 컴퓨터 상가에도 20여명의 여성 CEO가 홀로 또는 남편과 함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최근 몇년 사이 여사장 또는 그와 비슷한 직책의 여성들이 많이 늘고 있는 것은 유통업계의 현실과 직결된다.

 불과 3∼4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용산에는 여직원과 남자 직원이 공모를 해 공금을 횡령하거나 물품 대금을 수금해 도주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이에 따라 집에 있던 여성들이 남편의 사업장에 나와 직접 자금과 재고를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유통업계에 여성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여성들이 매장을 관리하는 업체는 안전하다고 소문나 있다. 그만큼 여신 및 재고관리에 철두철미하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이가 용산 나진전자월드 17동 기묘씨앤씨의 신순덕 사장과 19동 조립PC 및 브라더프린터 대리점인 동림시스템의 박은희 사장이다. 신 사장과 박 사장은 용산에 나온 지 벌써 만 10년째다. 특히 박 사장은 남편을 도와주러 나왔다가 지금은 아예 대표자로 눌러앉고 남편 신인섭 사장은 신규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유통업체인 녹도정보통신의 경우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아직 미혼인 송미린 사장은 언니인 송두미 사장(현 해원디지털 대표)과 함께 CD롬드라이브 유통에서 시작해 용산 HDD 업계를 움직이는 큰손이 됐다. 또 신세계유통의 신은정 사장도 경력은 5년밖에 안되지만 나름대로 HDD유통업계에서 자리를 확고히 잡았다.

 용산의 여성 CEO들의 공통된 특징은 대부분 실제로는 대표자이면서도 명함에는 ‘∼실장’이니 ‘∼부장’이니 하는 직책을 붙이고 있다는 점. 나이가 젊은 탓도 있지만 그렇게 한 직급 낮게 표기하는 것이 영업하기에는 더 좋다는 것이 그 이유다.

 

 ◇기묘씨앤씨 신순덕 사장

 나진전자월드 17동의 기묘씨앤씨(http://kimyo.co.kr)는 지난달 31일로 만 10주년을 맞았다. 이 회사의 신순덕 사장(47)은 지난 91년 당시 삼성전자를 퇴사하고 소모품 유통사업을 막 시작한 남편을 돕다가 전자상가에 눌러앉았다.

 기묘씨앤씨는 창업 3년째 되던 해에 엡손의 소모품 총판업체로 선정되고 HP서플라이 클럽 멤버로 선정되면서부터 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로써 현재는 전국에 거래하는 업체수만 200여개나 되고 올해 예상 매출액은 170억원에 이른다.

 신 사장이 척박하다는 유통업계, 소모품 분야에서 10년이나 사업을 지속해 오면서 오늘날 소모품 전문 업체로 우뚝 선 데는 신 사장만의 고집스런 ‘성실’ ‘친절’ 이란 경영방침이 가장 큰 바탕이었다.

 “남들은 술이다 뭐다해서 접대를 해가면서 기업체 시장을 공략했지만 여자인 저로서는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성실로써 고객을 대했습니다.”

 기묘씨앤씨는 초창기만해도 기업체를 대상으로 한 유지·보수 시장과 용산 도매영업이 비중이 5대5로 기업체를 대상으로 한 영업이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했지만 그 시장을 잡기 위해 한번도 비정상적인 영업은 하지 않았다. 그런 탓일까. 상가의 딜러들을 대상으로 한 도매 영업은 증가한 대신 기업체 유지보수 부문의 매출은 자연스레 감소해 이제는 10%도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사장은 여전히 원칙을 고수한다. 인터넷 시대에 들어서 저가경쟁이 치열하지만 지도가격 이하로 판매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금계산서도 받을 대로 다 받고 발행할 것 모두 발행한다.

 “경험이 일천했던 터라 그냥 앞만 보고 성실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겪는 한계도 많았지만 성실로써 거래업체를 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풀리더군요.”

 신 사장은 앞으로 위축된 기업체영업과 지방영업을 강화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최근 영업을 담당할 과장 2명을 새로 뽑았다.

 

 ◇동림시스템 박은희 사장

 “지금 저보고 PC를 조립하라고 하면 조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립PC 및 브라더프린터 총판업체인 동림시스템(http://www.coolpc.co.kr)의 박은희 사장(38)은 전자상가 생활 10년만에 전문가가 다 됐다. 각종 부품의 규격과 가격을 훤히 꿰뚫고 있다.

 박 사장은 지난 91년 남편 신인섭씨의 사무기기 영업을 돕기 위해 매장에 나오기 시작한 것이 인연이 돼 전자상가에 발을 들여 놓았다. 나진전자월드 19동의 토박이다.

 박 사장이 컴퓨터 유통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브라더’ 프린터 국내 총판을 맡으면서부터. 매출의 80% 정도를 브라더 프린터와 소모품으로 올리며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PC유통에까지 진출했다.

 박 사장과 남편 신 사장은 역할이 나뉘어져 있다. 박 사장은 소모품 부문에 대한 관리와 PC영업을 맡고 있고 신 사장은 소모품·프린터 영업을 맡고 있다. 그동안 경비절감 차원에서 계속 한 매장을 고집해왔지만 앞으로 신 사장이 구상하고 있는 신규 아이템이 확정되는 대로 법인으로 전환하고 회사도 분리할 생각이다. 또 영업사원을 채용해 기업체 판촉도 나설 계획이다. 인터넷에 각종 부품과 소모품 가격이 적나라하게 공개됨으로써 이윤이 크게 줄었다. 상가 외부 영업이 불가피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박 사장이 용산 전자상가에 나와 겪은 어려움은 그다지 많지는 않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직원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 경쟁자로 되돌아 올 때가 가장 가슴이 아팠다.

 박 사장은 “여자이기 때문에 겪은 불이익은 별로 없지만 기술적인 부문에는 한계가 있다”며 “최근에는 하나라도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직원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직접 부딪히며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과 중학교 2학년의 두 아들을 두고 있는 박 사장은 매장과 집만을 오가며 바쁘게 살았다. 상가는 10시가 넘어서 문을 열지만 어떤 때는 이른 아침에 출근할 정도로 의욕적이었다. 요즘 들어 경기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의욕이 다소 떨어진 상태지만 위축되지 않기 위해 마음을 한번 더 추스린다.

 

 ◇녹도정보통신 송미린 사장

 용산 컴퓨터 상가에서 ‘녹도’라는 이름을 대면 아마 모르는 상인이 거의 없을 듯하다. 선인상가 21동에 위치한 녹도정보통신(http://www.nokdo.co.kr)의 송미린 사장(37)은 용산 전자상가에 나온 지 이제 경우 6년이지만 HDD 도매 업계에서는 간판 스타가 됐다. 송 사장과 함께 언니 송두미 해원디지털 사장도 유명하다. 영업을 잘 하기로도 유명하지만 둘 다 아직 미혼일 정도로 사업에 대해 열정적이다.

 송 사장 자매가 설립한 녹도는 지난 95년 CD롬 드라이브 유통에서 시작해 저장장치 전문 업체로 급성장했다. 올해 송두미 사장은 PC제조업체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해원디지털이란 이름으로 분사하고 HDD유통은 동생인 송미린 사장이 떠맡았다.

 송 사장이 항상 탄탄대로를 걸어왔던 것은 아니다. 사업 초창기에 무분별한 거래로 인해 수억원대의 피해를 입은 일은 지금도 가슴속에 앙금처럼 아픔으로 남아있다.

 송 사장 자매가 험하다는 용산에서 이처럼 짧은 시간안에 HDD유통 분야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AS에 대한 확고한 정책 때문이다.

 “우리가 판매한 것은 우리가 책임집니다.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고집 때문에 요즘은 부담이 꽤 늘었다. 그레이 제품을 수입했던 업체들이 사업을 중단하는 바람에 AS부담을 고스란히 녹도가 떠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무상 AS방침에는 변화가 없다.

 송 사장은 “어차피 한두해 장사하고 그만 둘 것 아닐 바에야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AS만큼은 확실히 해 주기로 했다”며 “앞으로 정품 취급을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송 사장은 이와함께 플래시메모리와 섬드라이브 등 HDD 유관 제품으로 아이템을 확대해 저장장치 전문 유통업체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질 계획이다.

 <박영하기자 yh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