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성기업인협회(NFWBO)에 따르면 미국에서 100명 이상의 근로자를 보유한 여성 CEO가 운영하는 벤처는 99년 현재 900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9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도 여성이 경영일선에 과감히 나서고 있다. 남편이 창업한 기업의 내실을 다져가는 이들도 있고 아버지의 평생사업을 물려받은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 창업의 길로 들어서는 이들도 적지 않다. 바야흐로 여성 CEO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특히 이같은 움직임은 정보기술(IT) 붐을 타고 더욱 활성화되고 있다.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저돌적인 추진력뿐 아니라 내실을 중시하는 섬세함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타고난 본성. 실제로 인터넷시대로 들어서면서 각광받고 있는 웹에이전시 분야나 컨설팅 분야에서 활약하는 여성 CEO가 적지 않다.
그러나 남성들은 웃는다. 역시 기업의 꽃은 제조업이라고. 쇳가루 냄새나는 동네에 여자들이 얼씬이나 하겠느냐고. 물론 대부분은 맞는 얘기다. 실제로 제조업에 종사하는 여성 CEO의 숫자는 미미하다. 사업자등록증상에 사장으로 명기돼 있어도 사실은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법적인 이유로 이름만 올려놓은 여사장들이 허다한 것이 사실이다.
가전제조 분야는 더하다. 아마도 전기공학과 친한 여성이 적은 이유와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다. 가전제품은 여성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데도 왜 그걸 직접 만드는 이들은 적은 것일까. 하지만 이 동네도 변화의 바람을 맞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특히 몇몇 눈에 띄는 여사장들을 통해 가전제조 분야에서도 여성의 할 일이 많다는 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사업이 별겁니까. 생활속의 소중한 아이디어를 상품화해 이윤을 창출하면 되는 겁니다. 이윤이란 것도 간단해요. 100원 들여 만들어서 200원 받고 팔면 100원 남는 겁니다. 진짜 간단하다니까요.”
가전제조 분야에서 가장 걸출한 여성 CEO를 꼽으라면 대양이앤씨(http://www.dyenc.co.kr)의 임영현 사장(41)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간판 제품인 엠씨스퀘어의 높은 브랜드 인지도와 코스닥 등록기업이라는 명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임 사장의 활달하고 막힘 없는 성격도 무시할 수 없다. 창업주인 이준욱 회장의 부인인 임영현 사장은 업계에서 여장부로 통한다.
“유통과정에서 빚어지곤 하는 마찰 등 각종 어려움에 해결사로 나서는 것은 물론 아직까지도 고객의 체험담 위주로 꾸민 광고문안을 직접 기획·작성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발로 뛰어다니며 시장을 일군 전형이지요. 때로는 무서운 시어머니처럼 엄하게 다스리고 때로는 자상한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다독이는 사장님은 관리의 달인이라 부를 만합니다.”
임 사장에 대한 부하직원들의 평가다.
집중력학습기 엠씨스퀘어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가 없는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며 급성장한 기업 대양이앤씨. 확실한 콘셉트 덕분인지 대형 유통망에 의존하지 않고 자사 대리점을 전국에 구축하는 놀라운 신화를 남겼다. 이같은 성장사에 있어 핵심브레인 및 산파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창업주 이준욱 회장의 부인 임영현 사장이다.
“중요한 건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사람이란 의욕이 생겨야 열심히 일하지요. 사람은 기계가 아니니까요. 이 얘기를 왜 하냐구요. 매정할 땐 매정하고 감살 땐 감싸는 모성의 역할이 기업을 꾸려나가는 데도 힘이 되더란 거예요.”
모르는 이들은 그저 내조수준이거니 하지만 사실 임 사장은 대양이앤씨의 확실한 대들보 역할을 해내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수억대의 연봉을 주고 영입하는 전문경영인 부럽지 않다는 것이 주변의 한결 같은 평가. 개발·관리·회계·광고·영업 등 다방면으로 뻗치는 그의 활약을 보노라면 팔방미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e북과 연계한 학원 프랜차이즈 사업을 통해 엠씨스퀘어의 영광을 다시 한번 재연할 겁니다. 시장과 수요가 분명한 사업은 된다니까요. 두고 보십시오. 주주들에게 맹세컨대 꼭 됩니다.”
가전제조 분야의 여성 CEO 중에서 가장 오래된 베테랑을 꼽으라면 태양전자(http://www.taeyang.co.kr)의 이명례 사장(56)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대학시절엔 문학도로서 소설가의 꿈을 키웠던 그지만 우연히 필라멘트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인연으로 조명사업에 뛰어들었다.
81년 쓰러지기 직전의 조명회사를 인수한 그는 경남 김해를 근거지로 삼아 도로와 경기장 등의 산업조명 분야에 주력해왔다. 창원 국제자동차경주장의 조명이 바로 태양전자가 직접 설계·제작해 공급한 것이다. 필립스·오스람 등 해외 브랜드가 유난히 강세인 이 분야에서 중소기업이 이런 계약을 따낸 것은 쾌거라할 만하다. 지난해에는 90만달러 규모의 수출성과까지 거뒀을 정도.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 7월 여성경제인의 날에는 산업포장도 받았다.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는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조명으로 어두운 곳을 밝히는 일을 하게 됐네요. 조명사업은 기술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예술적인 감각도 요구합니다. 여성이 하기에 알맞은 사업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조명분야는 아직 국내에서 충분히 개화하지 않았습니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시장이지요.”
여성CEO의 강인하고 끈질긴 정신을 새삼 확인하게 하는 이가 있다. 한때 쇳가루 파동에 휘말려 문을 닫을 뻔했던 엔젤(http://www.newengel.co.kr)의 김점두리 사장(50)이다.
김 사장은 94년 부도 이후 사명을 엔젤녹즙기에서 엔젤로 바꾸고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두팔 걷고 나섰다. 엔젤녹즙기는 90년대초 월평균 5만여대의 녹즙기를 판매하면서 전국적인 녹즙기 열풍을 일으킨 업종 대표기업으로 그 당시 단일 상품으로 연간 500억원의 매출실적을 기록하는 초고속 성장을 하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았었다.
남편인 이문현 전 사장의 녹즙기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스테인리스 3기어 전기녹즙기 ‘헬스뱅크’를 선보였다. 미국과 중국에서 특허를 획득한 제품으로 그동안의 녹즙기 사용과정에서 제기된 문제점을 대폭 보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사장은 “국민소득증가에 따라 건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어 7년전보다 녹즙기 마케팅은 훨씬 용이할 것”이라며 “과거의 영광을 두 배로 다시 재현해낼 것”라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주부의 살림체험을 그대로 사업에 연결시킨 이도 있다. 스팀분사형 청소기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한영전기(http://www.steamcleaner.co.kr)의 한경희 사장(36). 이화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MBA를 마친 재원인 그는 국제올림픽위원회와 해외 유명기업체에서 마케팅과 영업을 담당하다 99년 한영전기를 창업했다.
“수많은 가전제품이 세상에 나와 있는데 나라고 못하랴 생각했지요. 일상 생활에서 쓰는 청소기인데 조금 고생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덤벼든 겁니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에서도 시도했다가 포기한 제품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사업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유통이 복잡한 나라에서는 유통계획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제품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 사장은 가전제품은 사용자가 대부분 여자이기 때문에 소비자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소비자의 요구를 훨씬 앞서가며 대응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말한다. 스팀청소기의 경우도 기술적인 어려움은 있었지만 생활 속에서 느껴온 필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었다. 한영전기는 스팀청소기 이외에도 획기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 상품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가전제품에서 디자인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는 요즘, 제품개발의 한 축을 담당하는 디자인업체 사장의 역할도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우퍼디자인(http://www.woofer.co.kr)의 한경하 사장(38)은 LG전자의 진공청소기, 만도 위니아의 에어컨, 청호나이스의 정수기와 김치냉장고, 언아더월드의 3차원 고글, 자코휘트니스의 전동 런닝머신 등 각종 가전제품들을 통해 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아왔다.
“창업초기에는 산업디자인 분야에서 여성 CEO를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던 만큼 영업이 쉽지 않았습니다. 제품디자인이 제조업체와 파트너십을 이뤄 일하는 것인 만큼 남자 사장님들이 저희를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지요. 남자직원과 함께 상담을 가면 아래 직원으로 판단해 대표명함을 건네기 전엔 하대하기 일쑤였어요.”
하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여성 CEO가 지닌 강점과 남다른 감각을 보여주면서 조금씩 신뢰가 쌓여갔다고. 여성의 꼼꼼함과 세련된 감각을 바탕으로 생활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살려 초기에는 가전제품이나 화장품용기, 주방용품 등의 아이템 등을 주로 다뤄 좋은 성과를 거뒀다.
60대 베테랑이 있다면 당연히 20대 새내기도 있기 마련. 자동차 급발진 방지시스템으로 히트를 쳤던 유럽전자(http://www.enginestop.com)의 허영희 사장(29)은 새내기에 속한다.
97년부터 수입자동차 정비업체인 한창모터스를 운영하면서 자동차에 많은 관심을 가져온 허 사장은 급발진 사고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자 급발진 방지시스템인 ‘엔진스톱’을 개발한다. 과도한 엔진회전수에 도달하기 전에 미리 엔진을 꺼 사고를 예방해주는 제품으로 기존의 배선을 자를 필요없이 커넥터만 갈아끼우면 되도록 간편하게 설계해 더욱 인기를 모았다. 이밖에도 음주인식 자동 시동걸림 방지시스템을 개발해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최근에는 카드 소지자가 2m 내에 접근하면 작동되고 멀어지면 멈추는 근접거리 인식카드키를 개발해 시장개척에 나섰다. 개인사무기기나 컴퓨터, 자동차와 아파트 도어로크 등에 적용할 수 있는 편리하고 안전한 시스템이다.
“여자에다 어리다고 얕보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 건 실력으로 승부하면 다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현재의 장벽을 너무 크게 생각하다보면 스스로 덫에 걸리기 마련이지요. 꿋꿋하게 한 길로 가다보면 주변에 조력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더라구요.”
이들은 2001년 현재 시점에서는 분명 용감하고 당찬, 어쩌면 특별한 여성일 수 있다. 하지만 조만간 여성 CEO들이 특별히 주목받지 않는 세상이 온다. 그런 세상을 일구기 위해 이들은 선구자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정소영기자 syjung@etnews.co.kr>